9 문학 이야기

프리드리히 횔덜린 - 시인의 시인

필자 (匹子) 2023. 9. 14. 11:49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1770년 3월 20일 네카 강변의 라우펜에서 태어났습니다. 1772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횔덜린의 어머니는 1772년에 요한 크리스토프 고크와 재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부인 고크도 1779년에 사망합니다. 고크는 아이들을 끔찍히 사랑했으나, 일찍 유명을 달리 합니다.

 

 

 

 

 

1783년에 횔덜린은 튀빙겐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큰아들이 목사가 되어 집안을 책임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횔덜린은 마음은 문학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루이제 나스트라는 여성에 연정을 품었습니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였습니다. 학생이었던 헤겔, 셸링 그리고 횔덜린은 자유의 나무를 심었습니다.

 

 

 

사진은 루이제 나스트의 초상화입니다.  1787년에 17세의 횔덜린은 친구 이마누엘을 통해서 그의 사촌누나인 루이제를 알게 되었습니다. 두 청춘 남녀는 만나는 순간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느낍니다. 만나는 횟수가 잦아지자, 루이제의 부모는 이를 알아차리고, 딸을 하일브론의 수도원 학교에 보냅니다. 횔덜린은 그미의 부모를 찾아가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합니다. 이때 루이제의 부모는 착하고 영리하며, 다정다감한 횔덜린을 좋아하게 되고, 두 사람의 교제를 허락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횔덜린이 결혼까지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미의 부모는 약간 난색을 표명합니다. 결혼하기에는 두 사람이 너무 나이 어리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이 뒤따랐지만, 횔덜린은 아픈 가슴을 안고 튀빙겐 신학교로 돌아옵니다.

 

 

 

 

 

위의 사진은 횔덜린이 튀빙겐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부모와 살았던 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족이 경제적으로 궁핍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큰아들 횔덜린이 목사가 되어 집안의 기둥이 되기를 애타게 바랐습니다. 그러나 활덜린은 경제적으로 집안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집안에 경제적으로 피해를 주었습니다. 시인이 수십년 후에 정신병에 시달리게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생활비를 절약하여, 수년 동안 횔덜린에게 보냈습니다.

 

 

 

 

 

사진은 횔덜린의 어머니, 요한나 크리스티아나 고크 (1748 - 1728)의 모습입니다. 그미는 목사의 딸로 태어나, 횔덜린의 아버지와 결혼하여, 횔덜린 그리고 그의 여동생 엘레오노라를 출산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횔덜린의 아버지, 하인리히 횔덜린은 1772년에 유명을 달리합니다. 그래서 그미는 주위의 포도주 상인인 크리스토프 고크와 결혼하여 아들 카를 고크를 낳았습니다. 크리스토프는 참으로 인간적 중후함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나, 1779년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1779년 홍수가 났을 때 뉘르팅겐 시장이었던 고크는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려다가 자신이 그만 강물에 떠내려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요한나는 두 번에 걸쳐 과부가 됩니다. 이때 그미의 나이는 불과 31세였습니다. 

 

 

 

 

위의 사진은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다니엘 슈바르트 (1739 - 1791)의 초상화입니다. 그는 "숭어 Forellen"러난 시를 집필하였는데, 이 작품은 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의 현악오중주로 작곡되었습니다. 뷔르템베르크 공국은 영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독일의 가난한 아이들을 잡아서 인신매매 용으로 영국으로 보냈습니다. 슈바르트는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습니다. 그러자 뷔르템베르크 공국은 경찰을 동원하여 그를 사로 잡아서 고문한 다음에 아스베르크 요새에 구금하였습니다. 슈바르트는 당시에 10년동안 아스터베르크 감옥에서 수감되어 고문의 고초를 겪었는데, 횔덜린은 청년 시절에 먼 발치에서 그를 바라보며, 고문이 어떤가를 생생하게 접한 바 있습니다. 슈바르트는 이곳에서 독서할 수도 집필에 몰두할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1787년에 그는 카를 오이겐 공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다음을 클릭하면 슈바르트의 작사, 슈베르트의 작곡 가곡 숭어를 들을 수 있습니다. (1분 45초)

https://www.youtube.com/watch?v=NF9DrUXowBo

 

 

 

 

횔덜린의 연인, 수제테 곤타르 (1769 - 1802)의 조각상. 그미는 1786년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와 결혼하여 네 아이를 낳았습니다. 1796년 1월 횔덜린은 이곳에 가정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수제테를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횔덜린은 그미를 디오티마라고 명명했습니다. 수제테는 깊은 교양과 예술적 자양을 지닌 여성이었습니다. 그미는 횔덜린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으며, 소설 '히페리온'을 집필하도록 자극하였습니다. 그러나 1798년 9월에 횔덜린은 수제테와 작별을 고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미는 남편과 가정 교사의 문제로 심하게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횔덜린이 수제테에게 보낸 편지는 오늘날 3통 남아 있습니다. 맨 마지막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거예요. 안녕, 안녕히 계세요. 그대는 내 마음속에 언제나 머물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대는 내 심장 속에서 생동하고 있을 테지요, 안녕

 

Ich kann nicht weiter schreiben, Lebe wohl! Lebe wohl! Du bist unvergänglich in mir! und bleibst so lang ich bleibe"

 

 

 

 

소설 히페리온의 표지입니다. 횔덜린은 수많은 습작을 거쳐, 명작 히페리온을 완성하였습니다. 1792년에 착수하여 1798년에 완성하였습니다. 횔덜린은 자신의 문학을 지지할 사람을 찾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설을 통해서 문학적 명성을 크게 얻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히페리온을 사지 않고, "젊은 베르테르의 고뇌"만을 구입하였습니다. 가난한 횔덜린은 오랫동안 "접장 Hofmeister"으로 생계를 이어야 했습니다. 그는 샤를로테 폰 칼프, 실러, 피히테 등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큰 도움을 줄 수 없었으며, 실러는 의도적으로 그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보다도 더 훌륭한 시를 썼기 때문에 질투심이 끓어올랐던 것입니다.

 

 

 

 

1800년 횔덜린은 자신의 연인 수제테 곤타르 (디오티마)와 헤어진 다음에 프랑스의 보르도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가정교사의 자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횔덜린의 탁월한 시편들이 탄생합니다. 그해 6월에 수제테 곤타르는 사망합니다. 10월에 독일로 돌아온 횔덜린은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우울증을 앓게 되었으며, 일시적으로 삶의 욕구를 상실합니다.

 

 

 

 

 

 

 

사진은 고대 그리스 극작가 엠페도클레스의 모습입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서 태어나 철학과 의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칠리아에서 정치적으로 고초를 겪다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다고 전합니다. 그는 사랑과 미움의 결합을 삶의 근본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횔덜린은 1797년에서 1800년 사이에 극작품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을 집필하였는데, 끝내 완성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남겼습니다. 여기서 횔덜린은 엠페도클레스가 이상 국가를 실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에트나 화산에서 신발을 벗어놓고 자살하는 과정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습니다.

 

 

 

 

 

 

소도시 홈부르크의 모습입니다. 19세기에는 이와는 달랐습니다. 횔덜린은 이곳에서 문우 엠머리히, 뵐렌도르프, 스토이들린 그리고 싱클레어 등의 문우들과 만나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19세기 초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출현하였는데, 끌어주고 당겨주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서 문학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무명 작가들이 부지기수입니다.

 

 

 

 

 

1805년 횔덜린의 친구 이자크 싱클레어는 반역죄로 체포됩니다. 횔덜린의 문우들 대부분은 병으로 사망하거나, 정치적으로 핍박을 당하게 되었으며, 더러는 다른 지역으로 추방당합니다

. 친구들의 끔찍한 소식으로

횔덜린은 또 한 번 쓰라린 고통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더 이상 어떠한 시 작품 조차도 집필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사실 횔덜린의 대부분의 작품은 1805년 이전에 완성된 것입니다. 그후 횔덜린은 더 이상 규칙적으로 작품을 생산하지 않습니다

.

 

 

 

 

사진은 정신병원에서 사용되는 강제조끼Zwangsjacke. 의사들은 저항하는 환자들에게 이것을 입혀서 진정시킵니다. 과거에는 정신병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병자들은 뭉둥이찜질을 당하곤하였습니다. 얻어맞는 순간에는 환자가 고통을 느끼고 제정신을 차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신병자들에게 입히던 "강제 조끼 Zwangsjacke"의 모습입니다. 마땅한 사진이 없어서 이것으로 대치합니다. 1806년 횔덜린 역시 반역 혐의로 강제 조끼를 걸친 채 아우텐리트 병원으로 송치되었습다. 이때 그는 경찰의 손을 황급히 뿌리치면서, "나는 죄짓지 않았어. 자코뱅주의자가 아니야. Ich bin unschuldig. kein Jakobiner."하고 외치다가 그 자리에서 졸도합니다.

 

 

 

 

 

프랑스의 독문학자 피에르 베르토 (Pierre Bertaux, 1907 - 1986). 그는 평생 횔덜린을 연구하였습니다. 횔덜린은 베르토의 견해에 의하면 미친 게 아니라, 감옥에서 육체적으로 고통당하지 않으려고 미친 척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횔덜린은 시대 착오적 정신 착란의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스카르다넬리, 살바토레 로자, 부오나로티 등으로 명명하면서, 조용히 튀빙겐의 탑에서 칩거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늘날 연구가들에 의하면 횔덜린이 정신 분열과 "언어장애 Sprachstörung"에 시달린 것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정신 착란의 증세를 보이는 횔덜린은 1807년에 목수 에른스트 침머의 집에서 칩거하면서 살아갑니다. 1826년 그의 나이 56세에 비로소 첫 시집이 간행되었습니다.  횔덜린의 어머니는 1828년 그미가 사망할 때까지 횔덜린에게 매달 생활비를 송부하였습니다. 1838년 목수 침머가 사망하자, 그의 딸이 횔덜린을 돌봅니다. 1843년 횔덜린은 유명을 달리합니다.

 

 

횔덜린의 발언

 

1. Es hat mich bittere Tränen gekostet, als ich mich entschloss, das Vaterland zu verlassen.

조국을 떠나려고 결심했을 때, 나는 쓰라린 눈물을 흘려야 했다.

 

2.

Weh dem Fremdling, der aus Liebe wandert.

사랑 때문에 방황해야 하는 낯선 인간은 무척 고통스러워하네.

 

3. Es ist herzzerreissend, wenn man eure Dichter und Künstler sieht. die Guten, die den Genius noch achten und das Schöne lieben und pflegen.

만약 사람들이 시인이나 예술가를 바라보면 가슴이 찢어진다. 그들은 선한한 자들로서 정령을 준종하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며 가꾸는 자들이다.

 

4. 

Sie sind wie Fremdlinge im eigenen Haus.

그들은 자기 자신의 집의 이방인들이다.

 

5.

Ich war in Versuchung, Sie zu sehen. Und ich sah Sie nur, um zu wissen,

dass ich Ihnen nichts sein konnte.

나는 언제나 당신을 만나고 싶은 유혹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내가 당신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알기 위해서 당신을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

6.

Sie sind so recht, wie ein Dulder, Odysseus, der im Bettlergestalt an seiner

Türe sass, indes die unverschämten Freier lärmten und fragten, wer hat uns den landläufer hierher gebracht.

그들은 마치 인내하는 인간 오디세이처럼 올바르다. 오디세이는 자신의 문앞에서 거지 차림으로 앉아 있는데, 뻔뻔스러운 구혼자들은 떠들면서 누가 이따위 비렁뱅이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가?

 

 

'9 문학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인하르트 이르글  (0) 2024.03.17
레싱, 그 놀라운 작가  (0) 2024.02.24
장 파울 그의 시대와 문학  (0) 2023.09.06
실러와 그의 시대  (0) 2023.01.19
마샤 칼레코  (0) 2022.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