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외국시

서로박: 캄파넬라의 옥중 시선 (5)

필자 (匹子) 2015. 11. 11. 10:36

원래 감옥에 갇힌 사람이 비밀리에 옆방에 갇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행동을 “통방 Kassiber”이라고 합니다. 감옥에 갇힌 시인이 간수의 김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옷고름에 혹은 종잇조각에 시를 새기는 것을 통방을 위한 문학적 작업이라고 하지요. 토마소 캄파넬라도 그렇게 비밀리에 문학적으로 통방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종잇조각에 철학 시를 기록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지 10년이 지나니까 원고 뭉치가 제법 두툼해졌습니다.

 

1600년은 유럽의 중세사에서 참으로 끔찍한 일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화형당해야 했습니다. 죽기 전에 그는 "기도를 원하는가?"하는 가톨릭 수사의 질문에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고 합니다.

 

토마소 캄파넬라는 1600년경에 정치적인 모반 당국에 체포되었습니다. 캄파넬라는 도합 일곱 번 고문을 당했습니다. 김근태 선생도 이근안에게 그러한 끔찍한 스무고개의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캄파넬라가 당한 마지막 고문은 40 시간 끝없이 지속되었고, 살갗이 찢어지고, 피는 감방의 빗물 통을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문의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서 그날 밤에 감방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차라리 이러한 고통을 당하느니, 자살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탈리아 당국은 그를 정신이상자로 분류하여 종신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캄파넬라는 그때부터 틈만 나는 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글은 신과의 통방이었습니다. 글 속에 자신의 사상과 느낌을 담는 것 - 바로 이러한 행위는 그의 부자유를 약간이나마 달래주는 위안이었습니다. 그의 철학 시를 읽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 그보다도 더 큰 참혹한 삶은 없으며, 어떠한 아픔이라고 하더라도 참아낼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신영복 교수의 책들, 나무야 나무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등이 우리에게 그토록 커다란 위안을 가져다주듯이 말입니다.1600년 31세의 나이로 감옥에 들어가서 1626년 57세의 나이로 석방되었으니, 무려 27년 동안 감옥에서 세월을 보낸 셈입니다. 그러나 캄파넬라에게 감옥은 한많은 이승의 집필실이었습니다.

 

1612년, 그러니까 캄파넬라가 나폴리 감옥에 수감된 지 12년 째 되는 해에 놀라운 일이 발어졌습니다. 독일의 인문학자이자 법률가인 토비아스 아다미는 자신의 제자와 함께 여행 중이었습니다. 그는 작센의 귀족이며 나중에 군주가 되는 제자, 루돌프 폰 뷔르나우와 함께 그리스, 예루살렘 그리고 말타를 여행한 뒤 나폴리에 잠시 체류하게 됩니다. 이때 그는 이곳의 감옥에 철학자, 토마소 캄파넬라가 수감되어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그와의 면회를 요청합니다.

 

아다미는 자신의 인문주의자 서클에서 이미 캄파넬라의 명성을 이미 접한 바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가 어떻게 캄파넬라와 면회할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간수에게 뇌물을 건넸는지, 그게 아니라면 어수선한 사회적 분위기를 활용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확실한 것은 아다미가 1612년에 토마소 캄파넬라와 직접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캄파넬라는 자신이 쓴 철학 시편들과 다른 글들을 그에게 몰래 건네줍니다.

 

이 장면을 피부로 느끼려면 우리는 알렉산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소설을 연상하면 족할 것입니다. 몹쓸 유전병에 시달리는 어느 왕족은 죽어가면서, 주인공에게 보물섬의 지도를 건네주는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아마도 캄파넬라에게 원고는 마치 자신의 정신적 보물 geistige Elaborate과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10년 후, 그러니까 30년 전쟁이 유럽 전역을 페스트와 함께 쓸어간 1622년에 아다미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이탈리아어로 기술된 캄파넬라의 철학 시집을 간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