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자신의 생각이 미치는 곳으로 육체와 함께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을 인식하기 위해서 사물 속으로 침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우리의 지식, 우리의 갈망 그리고 애타게 갈구하는 보물과 그저 마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삶의 토대입니다. 이러한 삶의 토대는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심지어 고통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익숙해 있습니다. 캄파넬라의 견해가 육체에 적대적이라고 명명하곤 합니다. 어떤 의식은 비행의 공간이 우리에게 속할 뿐 아니라 실패로 끝나게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육체와 영혼의 관계는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경멸, 우리 속의 어린아이는 죽음에 대한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만, 이러한 두려움을 밝혀내는 게 급선무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다만 유아의 생각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육체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알고, 갈망하며, 동경하는 무엇과 일치시키려는 노력 등에 대한 하나의 전제조건일까요? 캄파넬라는 이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캄파넬라는 육체를 그러한 것들을 이해하는 데 방해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캄파넬라는 자신의 형이상학적 감옥 모티프를 발전시킵니다. 육체는 세 가지 관점에서 영혼을 방해합니다. 첫째로 그것은 지식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실 속으로 침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육체는 동경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다른 소중한 것들을 현혹시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갈구하는 진정한 무엇을 어떤 다른 무엇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셋째로 육체는 스스로 갈구하는 올바른 대상과 일치시키려는 제반 노력을 방해합니다.
모든 사물은 모든 곳에 존재하며, 모든 것들은 자체적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때로는 마음을 끌어당기거나 거부감 내지 혐오를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개별적으로 제각기 외부에 고립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서로 침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스스로 조차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계의 시스템은 어떠한 경우에도 관통할 수 있는 대상이 못됩니다. 인간의 순수한 지성은 시인과 철학자를 모든 공간으로 인도하지만, 결국 무지에 대한 감각적 정신적 인식에로만 이끌 뿐입니다. 우리는 빛의 움직임으로서 존재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의 출발점으로서 우리는 자신조차도 관통하여 투명하게 고찰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다른 피조물의 내면을 침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비운을 맛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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