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몸젠과 뮐러 (1)

필자 (匹子) 2021. 6. 22. 10:19

1. 몸젠의 삶 (1): 테오도르 몸젠은 (1817 – 1913) 1821년부터 북독의 올데스로에 지역의 목사로 일하는 큰아들로 태어나, 다섯 동생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아이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버지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주했지만, 테오도르 몸젠은 가톨릭에 대해서 거부감을 지닌 자유로운 프로테스탄트로 고향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비록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옌스 몸젠은 자식들을 어릴 때부터 교육을 통해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고전 문학에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몸젠은 처음에는 1838년 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였습니다. 1839년 그는 킬 대학교에서 나중에 독일의 유명한 작가로 거듭나게 될 테오도르 슈토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몸젠은 슈토름과 자신의 동생 티코 몸젠과 함께 시선집을 간행하였는데, 이 선집은 문단에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에 몸젠은 『문헌학자들의 법칙의 권위에 관하여 Ad legem de scribis et viatoribus et De auctoritate로 킬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몸젠의 관심사는 로마법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2. 몸젠의 삶 (2): 몸젠은 학자로 성공을 거두려고 했지만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가정교사로 살아야 했습니다. 1844년 덴마크 공국으로부터 장악금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덴마크령이었습니다. 몸젠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로 연구 여행을 떠나, 나폴리의 비석에 기록된 글들을 연구하는 서적을 출판했습니다. 1847년 독일로 돌아와서 저널리스트로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1848년 독일 혁명이 발발했을 때 많은 글을 발표하여 자신의 자유주의의 지조를 드러내었습니다. 바로 그해에 몸젠은 라이프치히 법학 교수로 초빙되었습니다. 1849년 작센에서 5월 폭동이 발발했을 때 고초를 겪고 대학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1849년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교수직을 얻었습니다. 1858년 몸젠은 프로이센 왕실 아카데미의 연구 교수가 되었으며, 1861년에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1902년 몸젠은 『로마사』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3. 인간, 테오도르 몸젠: 대학 교수로서 몸젠은 학생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인성이 유아독존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몸젠은 학문적으로는 탁월하지만, 인간으로서는 깐깐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식으로 처세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몸젠의 제자들 가운데 역사학 교수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제자 가운데에는 나중에 사회학의 가두가 되는 막스 베버가 있습니다. 막스 베버 역시 몸젠의 제자였지만, 역사학을 주전공으로 삼지 않고, 사회학으로 연구분야를 바꾸어서, 하이델베르크에서 자신의 터전을 쌓아야 했습니다. 1854년 몸젠은 출판업자 카를 라이머의 딸, 마리와 결혼하여 16명의 자식을 거느렸는데, 그 가운데 네 명이 죽고 12명이 어른이 되었습니다. 교수로서 월급 그리고 연구비를 받았지만, 그의 아내, 마리는 무척 힘들게 생활했다고 합니다. 자식이 12명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몸젠의 딸은 도합 여섯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네 명이 나중에 직업을 선택하였습니다. 여성으로서 직업을 지니는 게 당시에는 몹시 힘이 들었지만, 네 명의 딸들은 교사 내지 간호사로 일했다고 합니다.

 

4. 로마사 제 4권은 결본이다. 테오도르 몸젠은 역사 연구가로서 오랫동안 활약하다가, 190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노벨 문학상이 음악 미술 문학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예술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문헌학으로서의 문학 (文学)임을 자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독어독문학은 독일어와 독문학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독일어로 구성된 문헌학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수상작은 그의 평생의 역작 『로마사』였습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다섯 권으로 집필될 예정이었는데, 제 4권의 작품 소재는 로마 황제의 시대에서 로마의 몰락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권부터 3권까지의 내용은 로마의 건국부터 공화정이 끝날 때까지의 역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 5권의 작품 소재는 로마의 속국과 인접 국가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몸젠의 『로마사』는 5권으로 구상되었지만, 간행된 것은 4권에 불과합니다. 도서관에 가면 우리는 4권의 책만을 발견할 수 있으며, 제 4권이 “결본 ein Desiderat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몸젠의 로마사의 제 4권은 어떠한 이유에서 간행되지 않았을까요?

 

5. 몸젠이 『로마사』: 테오도르 몸젠은 거의 30년에 걸쳐 로마의 역사를 집필하였습니다. 1854년부터 1885년 사이에 그의 작품이 모조리 발표되었습니다. 이 책은 에드워드 기번 (Edward Gibbon, 1737 - 1794)의 약 3200 페어지에 달하는 『로마 쇠망사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와 함께 현대에서 가장 중요한 로마 역사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 1권과 제 3권은 1854년에서 1856년 사이에 간행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책을 집필하지 못하다가, 몸젠은 1885년에 『로마사』의 마지막 부분을 제 5권으로 간행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식민지, 다시 말해서 속국이 된 나라의 역사를 다룬 것이었습니다. 몸젠은 처음에는 이 책을 제 8권으로 간행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4권, 5권, 6권 그리고 7권 속에 약 500년에 달하는 로마 황제 치하의 역사 부분이 수록될 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의 역사 대목은 끝내 책으로 간행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우리는 몸젠의 로마사 제 4권 결본을 통하여 지식인으로서 끝내 권력에 몸을 굽히지 않는 기개 내지는 놀라운 비판의 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6. 몸젠의 『로마사』의 특징: 몸젠의 로마사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몸젠이 마르쿠스 키케로를 처음으로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했다는 사실입니다. 키케로는 몸젠에 의하면 국가의 수상으로서 아무런 신념도 정치적 의도도 지니지 않았으며,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관료주의를 표방하며 군주의 개로 살다가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 지식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7. 『로마사』 4권은 1990년까지 책으로 완성된 바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 4권이 집필되지 않은 이유를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몸젠이 남긴 편지와 논문들을 추적하였습니다. 어딘가에 반드시 몸젠의 원고가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몸젠의 원고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후의 역사가들은 몸젠이 어떤 말 못할 이유로 『로마사』 제 4권을 완성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부의 원고를 초고로 기록해두었다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이는 몸젠이 보낸 편지에서 그리고 그의 딸 아델하이트 몸젠의 책에서 부분적으로 암시되는 사항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즉 1880년 7월에 몸젠이 거주하던 베를린의 집에 불이 나서, 만권의 장서가 화염에 휩싸였는데, 이때 그의 원고가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사항입니다. 그후 몸젠은 더 이상 『로마사』 제 4권을 완성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테오도르 몸젠의 친필 원고를 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몸젠은 1863년부터 1888년 사이에 베를린에 있는 프로이센 왕립 대학교에서 거의 20학기 동안 『로마사』를 가르친 바 있습니다. 그것도 로마 황제의 등극 시기보터 로마의 몰락에 이르는 400년 동안의 역사가 당시의 강연을 통해서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강연은 이제 더 이상 글로써 재구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몸젠은 어째서 로마사 제 4권을 끝내 완성하지 않았던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