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근대영문헌

서로박: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2)

필자 (匹子) 2021. 9. 25. 10:14

마지막 제 5막은 도합 세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즉 고너릴 뿐 아니라, 리건 역시 에드먼드에게 눈독을 들였다는 사실 말입니다. 두 자매는 한 남자를 차지하게 위해서 표독스럽게 암투를 벌입니다. 에드거는 고너릴의 편지를 가지고, 그미의 남편 알바니를 찾아옵니다. 이때 놀라운 비밀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즉 고너릴은 에드먼드가 자신의 아들임을 전혀 모른 채 더러운 욕정을 채우려고 했다는 것이 바로 그 비밀이었습니다.

 

다른 한편 에드먼드는 부대장에게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돌아온 코르델리아를 죽이라.”고 명령한 다음 싸움터로 향합니다. 운명의 결전장에서 그는 저항 세력의 군대를 이끄는 에드거와 조우하게 됩니다. 에드먼드는 결투 끝에 결국 형의 손에 목숨을 잃습니다. 마지막으로 리어왕의 세 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질투심으로 부글거리던 고너릴은 자신의 연적, 여동생 리건을 독살합니다. 리건이 죽은 뒤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고너릴은 자신의 죄의식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결국 자결을 선택합니다.

 

불쌍한 셋째 딸에게도 비극적 최후가 찾아옵니다. 코르델리아는 에드먼드 군인들에 의해 감옥에서 처형당합니다. 리어왕은 뒤늦게 자신의 셋째 딸을 구하려고 하지만, 아무런 방도가 없습니다. 리어 왕은 딸의 시신을 안고 큰소리로 절규합니다.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리어 왕은 딸의 뒤를 이어서 운명합니다. 나중에 왕국의 질서를 바로 잡고 국정을 이끌어나가는 사람은 에드가입니다.

 

리어왕이라는 이름은 영국 사람들이 상상한 바다의 신 “리르 Llyr”에서 유래합니다. “리르”는 갈리아 사람들이 숭배한 바다의 신 “리르 Lir”와 동일합니다. 이에 관한 기록은 1139년 지오프리 몬무트 Geoffrey of Monmouth가 라틴어로 기록한 『영국 제국의 역사』에 처음으로 언급된 바 있습니다. 그후 리어왕에 관한 이야기는 영국 작가 라파엘 홀린세드 Raphael Holinshed, 에드먼드 스펜서 Edmund Spenser 그리고 사무엘 하르스넷 Samuel Harsnett 등에 의해서 여러 역사서 속에 그리고 몇 편의 극작품에 반영된 바 있습니다. 친애하는 S, 이에 관해서는 문헌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일 테니까 더 이상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문헌들을 토대로 하여 자신의 사대비극에 속하는 불멸의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이전의 작품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막내딸을 둘러싼 감동적 이야기이지만, 셰익스피어는 나이든 왕의 삶과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 리어왕이라는 기념비적인 인물을 축조했습니다. 첫 장면에서 관객은 어떤 파국을 감지하게 됩니다. 즉 리어왕의 태도는 결코 합리적이 아니며, 결코 용서받지 못하게 되리라는 점 말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권력욕으로 똘똘 뭉쳐 있는 남자입니다. 그렇기에 리어왕에게서는 인간에 대한 배려라든가 이해심이라고는 추호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대해서 사려 깊지 못하고, 셋째 딸에 대해서도 불만스러움을 드러냅니다. 코르델리아가 두 언니처럼 아빠를 사랑한다는 적극적 애정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데, 이는 결국 모든 사람들을 파국으로 몰아넣습니다. 리어왕은 진심으로 아빠를 사랑하는 딸을 배척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 켄트 백작을 멀리 추방시킵니다. 왜냐하면 백작은 코르델리아를 두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은 교활한 두 딸의 농간에 놀아난 것을 모르고, 환상에 사로잡힌 채 자신이 다스리는 가부장주의의 질서가 언제나 올바르다고 착각합니다. 그렇기에 리어왕의 사상과 감정이 허영심과 공명심에 현혹되어 있다고 표현하는 게 바를 것입니다.

 

리어왕은 거의 광기나 다를 바 없는 결단을 내립니다. 켄트 백작은 왕명을 “미친” 자의 판단이라고 공언합니다. 리어왕의 광기 앞에서는 어떠한 필연적이고 합리적 논리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왕은 처음부터 자기중심적으로 느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현실에 대한 세심하고도 구체적인 감각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리어왕은 속내 대신에 말 표현을 신뢰할 정도로 경망스럽습니다. 그의 경망스러움은 마치 얕은 개울의 철렁거림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리어왕은 냉정하게 보이는 셋째 딸, 코르델리아의 퉁명스러운 말에 상처 입고서는 폭풍우와 번개가 내리치는 들판에서 배회합니다. 끔찍한 날씨는 리어왕의 내면의 풍경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의 곁에 머무는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바보 그리고 광인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바보란 다름 아니라 하인으로 변장한 켄트 백작을 가리키며, 광인의 마스크를 뒤집어 쓴 사람은 바로 에드가를 지칭합니다. 이 순간 리어왕은 자신의 참모습을 비로소 인지하게 됩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그와 협력하려는 마음을 품게 된 것입니다.

 

코르델리아가 감옥에서 아버지와 재회했을 때, 리어왕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르러서야 권력이 인간에게 가하는 비인간적 폭력 그리고 권력 자체의 무의미함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S, 리어왕이 권력이란 “술수와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으므로, “마치 달과 함께 밀물로 차다가 썰물로 빠지는 법”이라고 독백하는 대목은 참으로 놀랍기 이를 데 없습니다. 여기서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이 엿보이고 있지요. 등장인물의 성격 변화의 과정을 중시하고 이를 집요하게 추적한 극작가는 이전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셰익스피어 극에 이르러서야 과거의 잘못 내지 착각을 깨닫고 더 나은 인간형으로 거듭나는 인간형이 무대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리어왕의 깨달음은 안타깝게도 때늦은 것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합리적 자세로 죄의 근원을 추적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합리적으로 돌아가는 끔찍한 세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사악한 인물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인과응보로 이해될 수 있지만, 선한 인물이 비극을 맞이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결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고너릴은 한 남자 (그미의 친아들!) 때문에 리건에 대한 끓어오르는 성적 질투심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여동생을 끝내 독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한 코르델리아 역시 비참한 운명적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등장인물, 에드가는 신들이 과연 인간의 운명을 정의롭게 판결하는가 하고 묻습니다. 글로스터 백작은 신들이 마치 아이들처럼 장난삼아서 인간의 목숨을 끊어버리는가? 하고 통렬한 질문을 던집니다. 에드먼드는 인간이 맞이해야 하는 비극이 우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고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그러한 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끔찍한 불행이 점철되고 있는 세계를 다룬 전형적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768년에 「리어왕」은 나훔 테이트 Nahum Tate에 의해서 달리 개작되어 공연되었는데, 이때부터 극작품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테이트는 바보와 광인의 인물을 없애고, 대신에 두 명의 등장인물의 사랑을 첨가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코르델리아 그리고 에드가 사이의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줄거리가 이렇게 변하게 됨으로써 작품은 낭만적인 멜로드라마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리어왕」은 157년 동안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절찬리에 공연되어,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유명한 배우이자 연출가로 활약한 데이비드 개릭 David Garrick은 26년 동안 리어왕의 역할을 맡아 연기해 왔는데, 어느 날 셰익스피어 원전에 충실하게 공연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가 연출한 1768년의 리어왕 공연은 안타깝게도 참담한 실패작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관객들은 아름다운 연애 장면을 즐겨 바라보려고 했을 뿐, 셰익스피어가 강조한 비극적 운명을 초래하게 한 주인공 리어왕의 성격 비판을 꿰뚫어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S, 「리어왕」은 오늘날 가족 치료의 관점에서도 얼마든지 도입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인간은 누구든 간에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행동하는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 타인이 부모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과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일은 분명히 별개입니다. 모든 일을 부모의 뜻에 따르는 것은 잘못입니다. 또한 부모라고 해서 자식의 직업과 결혼에 미주알고주알 간섭하는 것 역시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남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해나갈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흔히 심리학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 내지 판단을 가족의 특정 구성원에게 이전하여 동의를 구하는 것을 삼각관계의 행동이라고 규정합니다. 만약 한 인간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정당성을 가족 구성원 한 명에게 전가시키게 되면, 이들 사이에 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됩니다. 특정 문제에 대한 정당성은 가족 내의 관계 속에서 합리화되기 일쑤입니다.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삼각관계가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으면 그럴수록, 문제 해결은 더욱더 힘든 법이지요.

 

고너릴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여동생 리건에게서 찾고, 리건 역시 그것을 언니에게 전가하였습니다. 만약 리어왕에게 두 명의 딸이 있었더라면, 리어왕은 제 아무리 맹목적인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쉽사리 선한 딸을 매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끈끈한 가족 관계는 외부적 압박에 대해 하나의 심리적 방패막이는 될 수 있겠지만, 자립하는 데에는 그리고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