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하이너 뮐러의 피록테트

필자 (匹子) 2022. 4. 12. 09:44

뮐러는 주로 60년대 후반부터 신화적 소재를 다루었습니다. 그는 「건설」 그리고 「농부들」 등의 작품으로 인하여 당 문화 관료로부터 신랄하게 비판당했습니다. 구동독의 현실을 직접 다루려는 극작가의 의지는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친 셈입니다. 뮐러는 「피록테트」를 1958년 1964년 사이에 집필, 1968년에 서독에서 발표하게 했습니다. 작품은 1977년 라이프치히의 사설 극단에서 초연, 1977년 구동독에서 공식적으로 공연되었습니다.

 

「피록테트」는 맨 처음 소포클레스에 의해 집필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뮐러는 소포클레스의 작품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인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는 무인도 섬인 렘노스로 향합니다. 그곳에서는 나이든 장수, 피록테트가 수년전부터 은거하고 있습니다. 피록테트는 훌륭한 무기, 헤라클레스의 활을 지녔지만, 부상으로 인하여 그의 발은 썩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필록테트는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디세우스와 네오프톨레모스는 헤라클레스의 활을 지닌 늙은 장수를 구출하여 토로야로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리스 군인들의 사기는 충천하게 될 테고, 트로이 정복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게 두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지략과 속임수를 사용하여 오디세우스와 네오프톨레모스는 피록테트를 제압합니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 주인공 피록테트는 반신, 헤라클레스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뮐러의 작품에서는 피록테트는 네오프톨레모스의 손에 목숨을 잃습니다. 그리하여 오디세우스는 네오프톨레모스를 조종하는 실질적 주인공으로 남게 됩니다.

 

뮐러에 의하면 우리는 극적 진행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다만 모델로서”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 사용되는 것은 압축적인 운문 그리고 정교한 비유입니다. 극적 진행은 오로지 “태도 (Haltung)”를 보여줄 뿐, 어떤 특정한 “의미”를 뜻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인류의 전사 (前史)”속에 머무르고 있다고 합니다.

 

인류의 전사는 사회주의가 성립되기 이전의 시기로서 인간의 “품위 없는 행위의 연속”만이 주어져 있을 뿐입니다. 만약 시스템 자체가 문제로 제기될 경우에 극적 진행은 -뮐러에 의하면- 비로소 어떤 불가피성을 상실하게 되리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극작가의 의도가 명백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혁명 이전의 잘못된 관계 내지 문제점은 혁명 이후에 고스란히 남아서, 혁명 이후의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사로잡고 있다는 데에서 발견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인류의 전사가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서독의 비평가들은 「피록테트」에서 인간의 보편적 우화의 특성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 존재는 거짓, 속임수, 폭력성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독의 비평가들은 뮐러의 극작품을 오로지 구동독에 대한 은폐된 비판으로 파악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동독의 비평은 뮐러의 극작품이 제국주의적인 약탈 전쟁으로 인해 인간적 태도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하였습니다. 가령 베르너 미텐츠바이 Werner Mittenzwei 같은 비평가는 「피록테트」에서 반전적 (反戦的) 경향이 배여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로써 동서독 비평가들은 한결같이 극작품의 본질적 특성을 잘못 파악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극작품은 보편성, 필연성, 국가의 권익 (마키아벨리적인 모습을 띈 오디세우스) 그리고 특수성, 개별성, 자기 결정권, 필연성에 대한 거부 (사회의 바깥에서 숨어사는 피록테트) 사이의 변증법적 모순 관계의 우화를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순은 네오프톨레모스라는 중개자에 의해 행동으로 이전되고 있습니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주인공 피록테트를 속이고, 그에게 고통을 가하며, 결국 오디세우스의 신속한 하수인으로서 끝내 피록테트를 살해하고 맙니다.

 

합리적 계산가인 오디세우스에게 개인적 윤리 내지 일말의 동정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디세우스는 개인, 휴머니즘 그리고 주관적 사고의 몰락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이러한 특성은 스탈린주의적 전략과 테러로 요약될 수 있는데, 수 십 년 이상 이어온 공산주의 역사의 치욕적 정점으로 치달은 바 있습니다. 이 문제점은 뮐러의 작품 「마우저」 (1970)에서 다시금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화 극, 「피록테트」가 반공주의적 입장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작가는 (공산주의적) 휴머니즘과 (공산주의적) 제반 현실 정치 사이의 변증법을 우화적으로 전개시켰다”고 말하는 게 타당할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