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는 제반 국가들의 토대이다. Iustitia fundamentum regnorum” (토마스 아퀴나스)
- “형벌은 대부에게 적용되지 않으며, 예절은 서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刑不上大夫 礼不下庶人.”
- “급진적 자연법은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주체의 저항에서 출발한다.” (블로흐)
1.
친애하는 J, 미국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인구의 5%가 남한 토지의 80%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빈부 차이가 심한 나라에서 정의에 대한 관심이 끓어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 모릅니다. 사실 샌델 교수가 바람직한 것으로 지향하는 공동선 사회는 거시적으로 고찰할 때 사회주의 국가에서 추구하던 공동선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사항이 책에서 현상적으로 그리고 역사 연구의 차원에서 언급되고 있으니, 주어진 현실의 기준이 모호합니다.
논의의 결과는 어느 시대, 어떤 나라를 전제로 할 때 그리고 구체적으로 주어진 계층을 고려할 때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정의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문제 내지 계급 차이의 문제와 직결되는데, 샌델 교수는 공동선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내세움으로써 특정한 구체적 현실을 전제로 한 어떤 논의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정의는 역사적으로 중개되어야 하고, 사회의 행보 속에서 자신의 경향성 내지 가능성으로 검증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상으로부터 어떠한 정당성도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추상적 전언만 공허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서양의 가장 오래된 법은 주지하다시피 로마법입니다. 그런데 로마법은 채권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로마법은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만인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대부분의 법은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형식적으로 기술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요?
미리 말하자면 우리는 굳이 어떤 무엇을 법철학적으로 논할 때, “정의” 대신에 이상적인 법으로서의 자연법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의의 개념은 처음부터 계층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만인에게 자신의 것을 행하게 하라. Suum cuique tirbuere.” (Platon)라는 기본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가령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라는 계급 및 신분의 차이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고대 사회 사람들은 신분과 계층을 천부적인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미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실현된 정의는 오로지 동등한 계급 내에서만 어느 정도 유효할 뿐, 결코 계급 차이를 지닌 두 인간 사이에서는 결코 적용될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2.
친애하는 J, 정의란 무엇인가요? 미리 말하자면 정의는 항상 상류층 사람들의 권익을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그렇기에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정의로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의를 외치면서 법대로 하자고 외치는 사람들은 자신이 법적 투쟁을 통해서 승리할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법 규정은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의 권익을 위해서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정의는 역사적으로 고찰하건대 정의와는 무관하게 사용되어 왔습니다.
미리 말하건대 나는 “정의는 서로 다른 계층 사이에서는 절대로 통용될 수 없던 개념이다.”는 명제를 내세우려고 합니다. 이러한 명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중국에서는 주나라 이래로 다음과 같은 말이 회자되었는데, 이것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통용될 수 있습니다. 즉 “형벌은 대부에게 적용되지 않으며, 예절은 서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刑不上大夫 礼不下庶人.” 다시 말해 상류층 사람들은 형벌에 시달리는 경우가 없으며, 하류층 사람들은 예절을 알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형벌과 예절의 상관관계를 시사하는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것은 신분 차이를 처음부터 용인하는 전제 하에서 이해될 뿐입니다. 주지하자시피 동양의 역사는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인정해온 역사였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람직한 법, 즉 자연법의 이상을 추구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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