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서로박: (5) 돈 앞에서 공정과 정의는 없다

필자 (匹子) 2022. 12. 5. 11:04

(앞에서 계속됩니다.)

 

13. 통치에 유리하게 활용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의 개념: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정의의 개념은 처음부터 가부장주의의 사고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인민이 아니라 지배자, 다시 말해서 통치 기관에 유리하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개인으로서의 정당성 내지 개개인들의 사적 관계로서의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떤 (마치 관대한 자선이라든가 고결한 마음씨와 같은) 정서 내지 지조와 관계되는 미덕이 아니라, 처음부터 오로지 외부적으로 드러난 행동으로 국한되어 있을 뿐입니다. 

 

자고로 개인은 스스로 공명정대한 자세를 취하면서 얼마든지 불법적 행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의라든가 불의를 허용하거나 허용하지 않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오로지 객관성이라는 잣대에 불과합니다. 비록 “정의”가 근본적으로 어느 쪽에도 편파적인 판정을 하지 않는 공정함의 모델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공정함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권리를 희사하거나,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주는” 탁월한 존재 내지 에너지에 비롯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상기한 사항을 고려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공평성의 원칙은 권력자가 가진 것 없는 자 내지 힘없는 자들에게 베푸는 선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14. 토마스 아퀴나스, 정의는 신의 선물이며, 인간에 대한 질곡으로 원용된다.: 이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의의 개념을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한 중세 철학자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원죄를 전제로 한 상대적 자연법 속에서 정의로움의 개념을 예리하게 투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의는 결코 자유와 평등을 얻으려는 일반 대중들의 운동을 포괄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상부로부터 전해진 신의 선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정의로움은 마치 하나의 선물처럼 어떤 귀족 내지 신에 의해 선택받은 사람들에게 하달된 물건처럼 간주되었습니다. 

 

토마스의 정의의 개념은 천국으로부터 추방되기 이전에 아담이 지니고 있던 주체의 어떤 “정의”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원초적 상태의 절대적 자연법에 대한 통합도 아니며, 인간의 본성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천국으로부터 추방된 이후의 시대에서 유래한 객관적인 정의입니다. 그렇기에 정의로움은 천국으로부터 추방된 인간의 죄를 씻고, 갱생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변화시킨 자연법에 의거한 것으로서, 언제나 상부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은총과 관련될 뿐입니다. 따라서 정의는 오로지 지배계급이 고수해야할 덕목의 차원에서 이해될 뿐입니다.

 

15. 범죄에 대환 처벌과 치료: 보다 쉽게 말씀해 봅시다. 인간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모두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천국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예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의로움을 실현하는 일은 오로지 “범죄에 대한 처벌과 치료 Poena et remedium peccati”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국가는 어떻게 해서든 범죄를 처벌하고 치료해야 하며, 이를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인간이 지상에서 저지르는 모든 죄악을 처벌하고, 더 이상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처음부터 겁박하는 것 – 바로 이것이 정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의로움을 국가의 모든 정책의 방향으로 설정합니다.

 

16. 능력 차이, 계층마다 달리 적용되는 정의로움: 나아가 정의로움은 경제의 영역에 있어서 “정당한 가치”를 요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당한 가치란 동등한 가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상품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객관적 가치”에다 상인이 미리 지불한 재생산을 위한 비용을 추가한 가치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토마스가 말하는 정당한 가치는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언급하자면 어떤 유형의 “잉여 가치”가 첨가된 상품의 객관적 가치를 지칭합니다. 제각기 다른 계층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제각기 다른 액수의 생활비를 필요로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구분되어야 마땅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천국에서도 그러했고, 원죄 이후에도 그러했듯이 처음부터 불평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단순노동자로부터 제후에 이르기까지 제각기 다른 일을 행하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그 자체 합법적이며 당연하다고 합니다. 정의로움은 “자연의 합리성에 따라 영원한 법에 동참하는” 과업입니다. 그것은 지상의 행복과 천국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계층 간의 여러 가지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다스립니다. (Thomas: 75).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토마스 아퀴나스는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suum cuique”이라는 플라톤의 원칙을 더욱 공고히 하였습니다. 이로써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계층적 질서는 더욱 튼튼하게 확립되었습니다. 이것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추구한 상대적 자연법입니다. 여기서 법은 계층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이므로, 만인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