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폐쇄적 유교 사회 versus 친구와 형제의 나라 (2)

필자 (匹子) 2023. 1. 28. 11:09

(앞에서 계속됩니다.)

 

4. 공자의 팔은 밖으로 굽지 않는다.: 그래,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적 풍습이 온존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애써 떠올리지 않습니다. 즉 불과 백 년 전에 한국인들은 상투를 매었고, 임금을 마치 하느님처럼 극진하게 모셨으며, 노예가 존재했고, 사대부는 첩을 거느리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그러나 우리의 습관 그리고 의식을 여전히 배후에서 장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유교적 잔재입니다.

 

정치 집단의 구조, 조직 사회의 씨족 문화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의 여러 조직들은 수직 구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사대부 우월주의"가 아닌가요? 그러니까 (가장 앞서서 달리는) 독점 자본주의는 (가장 뒤에 처진) 씨족 이기주의와 결합되어 하나의 거대한 공룡 단체를 결성합니다. 모든 조직이 인맥, 학맥 그리고 혈맥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의 안전한 단체에 예속되는 일 - 그것은 생존 전략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대학도 해당됩니다. 한국에서 대학 진학은 신분 상승의 지름길이었습니다. 박노자 교수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학 교수는 마치 중세 유럽의 기사들과 같다." 실제로 사립대학 교수의 연구실은 중세 기사들의 방처럼 고립되어 있습니다. 사립 대 교수들은 전공이 같다고 하더라도, 별도로 만나 토론하는 법이 드뭅니다. 어디 대학만 그런가요? 신문사, 정당, 기업체 가릴 것 없이 폐쇄적으로 차단되어 있으며, 자유로운 토론을 그저 부분적으로만 용인하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토론 내지는 대화를 차단시키고, 수직 구조의 파벌주의를 비호하고 있을까요?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는 한 가지 사항은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개개인들의 의식에 깊이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변방의 사대부 중심적 유교 문화라는 사실 말입니다.

 

 

5. 자유인이 되려면 제 주장을 말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폐쇄적인 유교 문화를 떨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들이 중세의 “장원”과 같은 폐쇄적 조직 구도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요? 문제는 자유 대화와 토론의 문화를 활성화시키는 일,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실천은 무척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구도 속에 예속되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오늘날 서서히 변화될지 모릅니다. 과거에는 도시가 인간을 자유화하리라고 말하며, 주어진 곳을 떠나 대도시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노예 신분을 탈피하고 대도시의 수공업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장소의 이동과 같은 전 근대적인 방법을 동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터넷이 있지 않는가요? 인터넷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은 할 말을 다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인터넷이 익명의 언어폭력을 자행한다고 있더라도, 우리는 인터넷 앞에서 동등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인터넷이 존재하기 때문에, 폐쇄적으로 기득권을 누리던 씨족 문화는 사라지고, 토론의 장이 마련될 수 있습니다. 다만 페어플레이 그리고 사생활 침해라는 한계를 극복해야 하겠지요.

 

직원이 사장의 뜻대로 마냥 고분고분 일할 것인가요? 학생이 교수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견해 없는 리포트를 쓸 것인가요? 당원이 당수가 시키는 대로 모든 정책을 그냥 따를 것인가요? 아내가 남편, 시어머니 앞에서 벙어리 행세를 하며 살아갈 것인가요? 그렇다면 한국인의 탁월한 창의력과 비판력은 어디서 발휘될 수 있습니까? 어째서 한국인은 초등 교육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이고, 대학에서는 그토록 뒤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토론 부재로 인하여 창의력과 비판력이 개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6. 개인의 저항, 견해는 강력 접착제가 아니다.: 독일 정당의 예를 들기로 합니다. 독일에서는 당원이 무조건 당수의 말에 백 퍼센트 복종하는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그는 우선 건전한 토론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가 관철되도록 애를 씁니다. 만약 자신의 견해가 꺾이게 되면, 그는 이를 승복합니다. 옳은 소수는 때로는 나쁜 다수에 의해서 패배할 수 있습니다. 비록 당의 내부에서 견해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인간관계는 그대로 유지됩니다.

 

견해 차이와 인간관계는 별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수 정당 CDU 내에서 좌측에 앉은 자의 정치적 견해는 중도 정당 F.D.P. 내에서의 우측에 앉은 자의 그것보다도 더 진보적일 수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진보 정당 SPD의 우측에 앉은 자의 정치적 견해는 중도 정당 F.D.P.의 좌측에 포진한 자의 그것보다 더 보수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특정한 견해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단체에서 국가에서 무조건적으로 무시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로운 토론의 문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견해는 끈끈이 주걱이지만, 강력 접착제일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견해가 틀렸다고 승복할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자가 아닌가요?) 혹자는 항변할 것입니다. “경제적인 칼자루를 쥐고 있는 권위주의적 권력이 서슬 푸르게 도사리고 있는데,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자유로운 토론이냐?”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더 나은 사회적 삶에 대한 희망을 처음부터 포기한 셈이 아닐까요.

 

신문사 말단 기자는 편집장에게, 학생은 선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직원은 사장에게, 교인은 목사에게, 시다는 장인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무언가 부당하다고 따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만의 토로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불이익을 당하기는커녕, 변함없이 친구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수직구도의 폐쇄적인 늑대 사회가 아니라, 형제와 친구의 나라에서 살게 될 테지요. 건강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