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폐쇄적 유교 사회 versus 친구와 형제의 나라 (1)

필자 (匹子) 2023. 1. 28. 10:58

1. 빠름과 느림, 혹은 끈끈이주걱: 인터넷과 대중 매체로 인하여 누구나 세상이 참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을 실감합니다. 불과 어제 접한 정보는 오늘에는 휴지통 속으로 사라집니다. 급변하는 시대의 물결에 부응하려면, 컴퓨터와 영어 실력을 기본적으로 쌓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사이버 세상 속으로 빠져들면, 모든 게 자동적으로 검색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인간의 두뇌 속에 아무런 지식을 담을 필요가 없다고 착각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학생들이 그저 컴퓨터 조작법만 알면, 족하다고 말합니다. 젊은이들은 느릿느릿한 것을 싫어하지요. 오래된 골동품은 그들에게는 마치 사라진 고구려 시대처럼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느새 세상은 많이 변했습니다. 외부적 현실도 달라졌고, 인간 삶의 방식도 100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변모했습니다. 그러나 급변하는 시대와는 달리 느릿느릿하게 변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의식입니다. 레닌 (Lenin)이 말했던가요? 인간의 의식은 마치 개와 같은 보수성을 지니고 있어서, 주인에게 꼬리치고, 낯선 자에게 컹컹 짖어댄다고 말입니다. 그래, 견해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끈끈이주걱입니다.

 

누군가 어떤 특정한 견해를 지니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판단될 경우 어느 누구도 쉽사리 그것을 팽개치지 못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자기의 주장을 쉽사리 꺾으려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오히려 현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가령 몇몇 유명인사들은 공개적으로 비판당할 때 변명을 늘어놓으며, 잘못 없다고 항변합니다. 이때 그들의 태도가 어리석고 불쌍하게 보이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2. 세대 차이, 토끼는 없다: 인간의 의식은 느림보 걸음을 반복합니다. 정보 산업이 고도로 발달되고, 사이버 매체는 속도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의식은 세상의 변화에 발을 맞추지 못합니다. 아니, 발맞추지 못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폐가 있어요. 이는 거북이와 자동차가 서로 경주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여기에 토끼는 없습니다.

 

현실 변화와 의식 변화 사이의 차이는 얼마든지 세대와 세대 사이의 단절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지역감정은 장소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세대 차이는 시간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게 아닌가요? 지역감정은 주지하다시피 정치적 슬로건에 불과합니다. 이에 비해 세대 차이는 엄청난 심리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지역감정은 다른 그룹에 대한 보이지 않는 보편적 적개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세대 차이는 견해 차이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모든 사회 곳곳에 대화 단절이라는 뿌리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가령 나이 든 세대는 여전히 전근대적 풍습에 젖어 있는 반면, 젊은 세대는 유럽 사람들과 같이 사고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대화가 없습니다. 노인들은 도서관에 앉아 무언가 배우려 하지 않고, 젊은이들은 노인들과 친구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프랑스 노인들은 젊은이와 친구가 되어 어울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세대끼리 친구 관계를 결성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학자들이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토론이 부재하고, (남성적) 권위주의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는 데 있는지 모릅니다. 사장은 직원의 견해를 무시하고, 교사는 학생의 견해를 무시합니다. 남자는 여자의 견해를 무시하고, 노인은 아이의 견해를 무시합니다. 이러한 수직 구도의 풍토에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올바른 토론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공자의 장점은 1. 유연한 사고와 행동, 2. 제자들을 가르치는 다양한 방도, 3. 선왕의 도를 추구하는 정치 철학

공자의 단점은 1. 형식의 강조, 겉치례의 맹신, 2. 수직적 계층 질서의 용인, 3. 여성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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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변방의 폭력, 사회 구성체, 유교 문화: 한국 사회에 토론 문화를 활성화시키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폐쇄적 습성과 독선과 아집으로 가득 찬 자들의 권위주의를 떨치는 일이 중요합니다. 폐쇄적 습성과 권위주의는 식민지, 변방, 시골 등지에서 강하게 드러납니다. 예컨대 로마 시민들은 타 인종을 그렇게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변방의 로마 총독들은 온갖 행패를 부렸습니다.

 

이는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본부에서는 비교적 위계질서가 잡혀 있고, 졸병이라도 민주적으로 대접받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외부로부터 어느 정도 개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부로부터 동떨어진 파견 부대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령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은 도쿄에서 식민지 사람들을 괴롭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온갖 잔악한 행위를 저지른 곳은 바로 전쟁터, 식민 지역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 지금까지 변방에 불과했습니다. 변방의 문화는 대체로 수입 문명으로 이루어집니다. 가령 신석기 문화, 청동기 문화 그리고 철기 문화는 오래 전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습니다. 이는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주지하다시피 예술적으로 조야한, 그러나 기능적으로 탁월한 철기 문화만이 전승되었습니다.

 

이러한 패턴은 20세기에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한반도에 들이닥친 것은 (초기) 자본주의, 독점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한꺼번에 다양한 생산 양식이 유입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남한에서는 독점 자본주의 외에는 초기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등의 장점은 조금도 현실 삶에 반영되지 않습니다. 나는 여기서 한국의 사회사상사적 발전 과정 내지 그 특성 등을 피력할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한반도에는 여전히 유교 문화가 활개를 치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