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박설호: (1) 새로운 물질 이론 그 의미와 방향

필자 (匹子) 2023. 5. 25. 10:52

 

“북극에 봄이 오면/ 잠자던 곰의/ 가스가 피어오른다.(Ben Rawlence)

 

1. 들어가는 말

 

새로운 물질 이론은 과학 기술에 대한 인간의 관계, 자연과 환경에 관한 학제적인 이론의 흐름에서 태동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협소한 의미를 담고 있는 ”신유물론“ 대신에, ”새로운 물질 이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물질에 관한 사고는 오랜 시간에 걸쳐 관념 이론 속에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마르크스주의 신봉자들조차도 물질과 정신을 서로 분리하여 별개의 사항으로 파악하기에 이릅니다. 가령 블라디미르 I. 레닌Wladimir I. Lenin은 “어리석은 유물론보다는 영특한 관념 이론이 영특한 물질 이론에 더욱 근친해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여기서 물질의 개념은 정신과 대립하는 무엇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물질 이론은 주체와 객체, 정신과 세계 사이를 구분하는 데카르트 방식의 이원론을 처음부터 배격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물질 이론을 논할 때 고려해야 하는 두 가지 사항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서양의 관념 철학은 정신과 세계를 별개로 구분하는 이원론을 개진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몇몇 철학 사상은 정신과 세계라는 두 영역을 하나로 해명해 왔습니다. 예컨대 프리드리히 W. J. 셸링Friedrich W. J. von Schelling이 말하는 “세계영혼”의 개념 그리고 에른스트 블로흐의 “자연 주체”에 관한 논의는 물질과 정신의 동일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관념 이론에 의하면 물질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고립된 무엇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관점과 대립하는 무엇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유동하는 세계는 폐쇄적으로 고립되고, 스스로 움직이는 물질은 마치 정지 상태에 머무는 고체처럼 이해되었습니다. 이는 기계적 물질 이론가들과 노동자의 운동을 연구하는 정치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물질은 마치 인간 정신의 운동처럼 유동하면서 꿈틀거리는 무엇입니다. 둘째로 새로운 물질 이론의 토대는 이미 동양에서 하나의 기본적 사고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퀀텀 역학에 의하면 물체의 움직임은 도약으로 이해됩니다.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은 기의 움직임과 유사합니다. 전자와 같은 입자들이 마치 파동처럼 유동하고, 광선 파동은 마치 입자처럼 꿈틀거립니다. 이러한 현상은 데이비드 봄David Bohm의 과정 물리학에서 나타나는데,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기의 움직임을 방불케 합니다. 우리는 가령 혜강 최한기의 기 철학 그리고 다석 류영모의 “한얼”의 사고에서 놀라운 상징적 궤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물질 이론은 두 가지의 사상적 모티프로 나누어집니다. 그 하나는 사변적 실재론의 이론적 논거이며, 다른 하나는 물질로 향하는 페미니즘의 접근 방식을 가리킵니다. 사변적 실재론은 인간의 관점을 일차적으로 배격하고, 자연과 환경, 다시 말해서 객체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구명하려는 의향에서 출발합니다. 사변적 실재론은 지금까지 철학자들의 물질 이해가 인간의 일방적 관점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칸트의 “물 자체Ding an sich의 개념은 객체에 대한 단선적이고 일방적인 인식론적 결과로서, 한마디로 무지의 대명사라는 것입니다. 사변적 실재론은 가능하면 사물에 대한 인간의 개입을 배제하고 오로지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밝혀내려고 의도합니다. 이를테면 수행적 존재론을 표방하는 토머스 네일Thomas Nail은 물질을 하나의 불확정적 운동의 과정으로 파악합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새로운 물질 이론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 존재론적 관점에 의해서 전개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개별 학자들의 입장을 미시적으로 구명하는 작업을 지양하고, 논의의 방향을 새로운 물질 이론의 기본적 특징 그리고 시대정신 사이의 상관관계에 국한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물질 이론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 주체의 중심적 지위, 즉 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론적 대안, 2. 강력하게 활동하는 물질에 관한 구상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 3. 어떤 수정 가능한 존재론적인 이론 형식에 대한 옹호, 4. "연속체로서의 자연과 문화 사이의 복합적인 관계"의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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