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필자 (匹子) 2023. 1. 5. 11:37

1.

몇 달 전에 K 교수는 정년으로 대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한국이 낳은 위대한 물리학자로서 수십 년 간 교직에 몸담았던 분이다. K 교수는 많은 학계 사람들, 후학 그리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고별 강연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렇지만 그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젊은이처럼 정정하지 않는가? 나아가 물리학계에 끼친 그의 영향은 심대한 것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가 명예 교수로 학교에 남기를 원했지만, K 교수는 이마저 거절했다. 어느 제자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선생님, 우리가 싫으십니까?” 그때 K 교수는 반문했다. “자네, 알고 있는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2.

한참 동안 입장 바꿔 생각해 보았다. 그렇지만 범인 (凡人)이 어찌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정확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대충은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달마 대사가 남긴 것은 죽음과 늙음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관계되는지 모른다. 아니, 그것은 극복이 아니라, 아우름일 것이다. 늙음과 죽음을 아우르려는 의지 - 어쩌면 우리 역시 그러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 잡다한 일상사를 망각하기, 자연에 파묻혀 살기, 세인들의 뇌리에서 자신 이름 세 글자를 지우게 하기, 석양의 무법자로서 종심소욕 (從心所欲) 하기 등등....

 

3.

언젠가 나의 어머니는 자식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늙은이가 밖으로 쭈글쭈글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수치야.” 이렇듯 나의 어머니는 나이 듦을 그냥 부끄럽게 여기고 계셨다. 그러나 겉모습은 결코 수치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일부 노인들의 탐욕과 아집이 수치스럽다. 두둑한 돈주머니에 집착하는 자들을 생각해 보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견해를 꺾지 않으려는 말라비틀어진 경직성을 생각해 보라. 어느 책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가난 자체는 결코 수치스러운 게 아니다. 오히려 가난을 초래하게 하는 폭정이 수치스럽다”고.

 

4.

나이 들어서 눈이 침침하고, 귀먹는 것은 과히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잡다한 노인들의 시력과 청력이 약화되는 것은 형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조물주는 인간 동물에게 하나의 축복을 내렸는지 모른다. 세상살이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말고, 더 이상 가시적인 이익에 혈안이 되지 말라. 돈에 집착하는 시정잡배들의 목청에 대신에,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은은히 들어라. 비록 눈앞이 침침하나, 자신의 의식 속에서 밝은 상으로 나타나는 내면의 사물들을 보아라.

 

그래, 찬란한 과거를 떠올릴 수 있는 노년의 시간이 어찌 나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기억이 조만간 도래할 죽음의 물감과 착색되어, 어떤 회한과 그리움을 남기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최소한 아름다운 상으로 머물 것이다.

 

5.

이에 비하면 우리의 정치가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정년을 모른다. 이제 70이 넘은 사람들이 신문지상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나이든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권력을 탐하면서, 돈을 끌어 모은 자들이 아닌가? 대통령 후보자들도 덩달아 왜 그들을 만나서 지지를 부탁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원로 정치가들이 민심을 반영하는 상징적 존재라도 된단 말인가? 그럴지 모른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정치판의 씨름 선수로 자처했으니까. 일선에서 물러날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원로 정치가들이지, 앞에서 언급한 K 교수가 아니다.

 

6.

나는 고위층의 노인들이 더 이상 권력과 금력에 집착하지 말고, 달마 대사처럼 어디론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게 싫으면 차라리 사회 밑바닥으로 내려가 일상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게 좋지 않는가? 클린턴은 대통령 직을 그만 두고 토크쇼의 사회자로 일하지 않는가? 그게 싫으면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지내도 좋지 않는가?

 

유럽의 도서관을 가보라. 그곳에서 책과 씨름하는 사람들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노파들이 많이 있다. 떨리는 손으로 돋보기를 들고 깨알 같은 책을 들여다보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말할 수 없는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왜 남한의 도서관에는 노인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가? 왜 부자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 속에는 남한 사회의 병리 현상의 핵심 사항이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 남한에서 돈과 책은 서로 상극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