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플로라 트리스탕

필자 (匹子) 2018. 12. 22. 21:44

1. 망각된 어느 작가의 이야기: 친애하는 F, 이 자리를 빌어서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온갖 핍박을 감내하면서 살았던 여성, 플로라 트리스탕 (1803 1844)에 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플로라가 남긴 문헌은 사회주의 사상과 그리고 페미니즘의 분야에서 많은 교훈을 전해줍니다만, 오늘날 정작 그미의 삶을 반추하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그미가 화가 고갱의 외할머니였다는 사실만 간간이 접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19세기 프랑스의 어느 여성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가난하고 고달픈 환경을 극복하고, 나중에 사회주의 운동가 내지 여권 운동가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는가? 하는 문제를 추적하는 일은 나름대로 가치를 지니리라고 판단됩니다.

 

2. 유년기에 체험한 가난과 정략결혼: 플로라는 1804년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미의 아버지는 마리아노 트리스탕 이 모스코소라는 긴 이름을 지닌 페루의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에스파냐에서 살고 있었는데, 프랑스 여인, 안느 피에르 레즈니를 만나 결혼한 뒤에 파리에 정착합니다. 두 사람의 행복은 짤막한 순간으로 끝나버립니다. 왜냐하면 플로라의 아버지가 1807년에 이름 모를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플로라의 어머니는 어린 딸을 데리고, 파리에서 힘들게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습니다. 플로라 역시 학교에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없었고, 이른 나이에 공장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1821년 그미는 인쇄 공장을 경영하던 남자와 계약 결혼을 맺습니다. 말이 계약이지, 플로라로서는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치러야했던 정략적 결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남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남편인 앙드레 프랑스와 샤잘은 괴팍한 인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걸핏하면 아내에게 손찌검을 가하고, 함부로 대합니다. 플로라는 원하지 않는 동침을 강요당하거나 겁탈 당하곤 하였습니다.

 

 

 

 

3. 남편의 가혹 행위: 플로라는 남편의 학대를 더 이상 감내할 수 없어서 결혼한 지 4년 후에 어디론가 도주합니다. 그런데 파리의 법정은 남편의 폭력 행위를 범죄 행위로 인정하지 않고, 그미의 무단가출을 나쁜 파혼 행위로 규정합니다. 이러한 결정은 18세기 프랑스 사회가 가부장주의의 전근대적인 특성을 고수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두 사람 사이의 이혼은 거의 불가능하게 됩니다. 불행한 결혼 생활에도 불구하고 플로라는 아들 둘, 딸 하나를 출산합니다. 플로라 트리스탕은 다시 자식들을 데리고 잠행 (潛行)을 시작합니다. 남편의 폭력 행위가 날이 갈수록 광포해졌기 때문입니다. 1825년부터 약 5년 동안 플로라는 남편과 가부장주의의 폭력으로 숨어서 살아야 했습니다. 두 아들은 비참한 환경에서 일찍 요절했고, , 알린느만 생존하게 됩니다. 플로라는 생계를 위해서 귀족의 하녀로 생활해야 합니다. 샤잘은 도망친 아내를 찾아서 동분서주하며, 수소문했는데, 그때마다 플로라는 딸을 데리고 다른 도시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4. 새로운 땅, 페루: 플로라는 남편을 떠나 가난하게 살면서, 어떤 희망을 찾으려고 합니다. 어쩌면 페루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친척이 자신에게 도움을 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플로라는 딸을 어머니에게 맡겨두고, 페루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해는 1833년이었습니다. 그미는 아버지의 친척인 부유한 귀족의 농장에서 약 8개월간 체류합니다. 페루의 귀족은 페루의 아레키타 지역에서 거대한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노동에 임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노예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페루의 상류층 사람들은 인종과 계층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가난한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며 살았습니다. 플로라는 이에 대해 몹시 격분합니다. 이따금 농장을 방문하여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가를 생생하게 체험합니다. 친척들은 그미의 이러한 행위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미의 노동 현장의 방문 그리고 노예의 인권을 되찾기 위한 일련의 운동은 다른 귀족들의 심사를 거슬리게 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플로라의 올곧은 정치 활동은 어떠한 유산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1834년 플로라는 배를 타고 프랑스로 되돌아옵니다.

 

5. 페루 여행기: 파리에 도착한 즉시 플로라는 자신의 여행기를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제목은 파리 여인의 여행기 Pérégrinations d’une paria”였습니다. 그미의 책은 비유럽권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현실을 유럽 여성의 눈으로 기록한 최초의 문헌이 됩니다. 물론 작품 속에는 제 3세계에 대한 파리 여자의 자기중심적 시각 내지 약간의 우월의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장점으로서 우리는 사회 개혁의 열정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바로 이러한 특성 때문에 플로라 트리스탕을 체 게바라의 누님 내지는 19세기의 체 게바라라고 명명하곤 하였습니다. 플로라의 여행기는 페루의 현실을 몹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다루고 있는데, 동시대인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화자가 여성 특유의 풍부한 정서를 절제하며, 모든 것을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비극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페루의 해안 도시

 

6. 플로라 트리스탕, 총 맞아 부상당하다.: 그러나 플로라 트리스탕은 개인적으로 고초를 겪어야 합니다. 남편, 샤잘은 플로라가 파리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 그미를 찾아 나섭니다. 플로라가 자신과 만나기를 거부하고 다시 도주하려고 하자, 그는 이번에는 자신의 딸을 겁박하여 플로라를 체포하려고 합니다. 이 와중에서 샤잘은 자신의 친딸에게서 더러운 성욕을 채우려고 합니다. 알린느가 어머니에게 보낸 펀지에 의하면 샤잘은 불과 12세 나이의 어린 친딸의 순결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모녀는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서 법적인 남편을 근친상간의 혐의로 고소하는 한편, 알린느에 대한 친권을 법적으로 요구합니다. 플로라가 자신을 고소했다는 소식을 접한 샤잘은 피스톨을 구입하여 플로라를 살해하려고 시도합니다. 결국 플로라는 총을 맞게 되어 심한 중상을 입습니다. 부상의 후유증은 그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고통을 가합니다. 몇 달 후에 샤잘에 대한 재판이 시작됩니다. 재판정은 샤잘에게 20년 타 지역에서의 강제 노동의 판결을 내립니다. 또한 플로라는 남편과 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게 됩니다.

 

7. 여성 운동가로서의 행적: 1838년에서 사망할 때까지 6년간 플로라는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대단한 활동을 벌입니다. 그미는 공장, 빈민가, 감옥 그리고 홍등가 등을 찾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 받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라고 플로라는 굳게 믿었습니다. 플로라는 프랑스 전역을 다녔으며, 영국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그미의 런던 방문기는 책으로 간행됩니다. 1840년에 간행된 런던 산책 Promenomades in London이 바로 그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플로라는 런던 여행객들이 그저 눈앞의 아름다움에 경탄할 뿐, 대도시의 빈민가에 대해서 외면한다는 사실을 꼬집었습니다. 1843년 플로라는 다시 전국을 돌면서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하였습니다. 노동자들은 함께 힘을 뭉쳐서 자신의 권익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플로라의 행위는 작은 일에서 출발했지만, 그미의 존재는 권력자 그리고 기득권 계층에게는 눈위의 가시와 같았습니다. 수많은 반동세력 그리고 경찰 앞잡이들이 플로라에게 집요하게 위협을 가합니다. 보수 신문은 플로라 트리스탕을 조롱하고 비아냥거곤 하였습니다.

 

8. 마지막의 삶: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신 개인에게 향하는 거대한 세력의 비난과 억압에 대해 심리적으로 의기소침하여 침묵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플로라 트리스탕은 스스로 자신의 목숨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사항은 어떠한 억압과 고초에도 꺾이지 않는 그미의 심리적 담대함,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플로라는 마차 여행의 피로에도 개의치 않고 강연에 강연을 거듭했습니다. 1944년 보르도에서 플로라는 기역이 소진하여 자리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그미의 병약한 육체에 침투한 것은 티푸스의 균이었습니다. 1844114일 플로라는 41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9. 후기, 플로라의 친구들: 플로라 트리스탕은 조르주 상드, 빅토르 위고, 앙리 드 생시몽 그리고 샤를 푸리에 등과 교우하였습니다. 그미는 마르크스와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의 책을 읽고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강연 중에 그미가 거둔 작은 수확 중에 하나는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프루동과 만나 사회 개혁의 필연성의 사고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플로라는 생시몽주의자로서 남녀평등의 삶을 추구하는 앵팡틴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미는 앵팡틴과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제도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한편 플로라의 딸, 알린느는 어머니가 사망한 지 몇 년 후에 저널리스트, 클로비스 고갱과 결혼하여, 후기낭만주의 화가 폴 고갱을 낳았습니다. 알린느는 1849년부터 1855년까지 남편과 아들과 함께 페루에서 거주하기도 하였습니다. 페루 그곳은 자신의 어머니가 처음으로 찾아가서 살았던 새로운 고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나중에 폴 고갱이 타히티로 떠나 그곳에서 자신의 마지막 삶을 보낸 것 역시 고향을 찾으려는 열망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