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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호프만슈탈의 소베이데의 결혼

필자 (匹子) 2023. 3. 25. 09:46

(1) 결혼과 후회: 친애하는 K, 오늘 말씀드릴 주제는 결혼에 관한 것입니다. 속담에 의하면 “인간은 결혼해도 후회하고, 결혼하지 않아도 후회한다.”고 합니다. 자고로 결혼은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오랜 기다림의 성취, 바로 그것이지요. 물론 결혼의 의미 자체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경제 문제, 가족 구성원의 사회적 삶, 성도덕 등을 고려하면, 당신은 나의 말을 이해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결혼”의 보편적 기능을 추상적으로 정의 내린다는 자체가 무리일 것입니다. 나는 결혼의 사회적 심리적 의미에 관해서 여기서 일장 연설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결혼의 이상이란 사랑의 완성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어째서 결혼은 항상 “후회”라는 묘한 감정을 동반하는 것일까요? 

 

(2) 실현의 아포리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오래 갈구하던 무엇이 실현되는 순간 인간은 누구든 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 그리고 동시에 어떤 허망함을 느낍니다. 사랑이 실현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열정은 그렇게도 격렬한 감정을 동반하던 밀물이었다면, 결혼 이후의 느낌은 성취된 사랑이 마치 썰물처럼 허망하게 그냥 사라지는 데 대한 “썰렁함”과 아쉬움일 것입니다. 결혼 전에 고수했던 순결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고, 매일 대하는 남편의 얼굴에 대해 지루함을 느끼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합니다. ^^ 이러한 허망함과 아쉬움을 에른스트 블로흐는 “실현의 아포리아 (Die Aporie der Verwirklichung)”, 성취의 우울 (Melancholie des Erfüllens) 등의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아포리아란 “출구 없음” 내지 “막다른 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허망함과 아쉬움은 결혼 이후에 때로는 후회의 마음과 병행해서 나타나곤 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분은 이와는 달리 느낍니다. 가령 나이든 미혼녀는 기회의 상실을 마냥 아쉬워하면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갈망을 계속 고수합니다. 이렇든 저렇든 간에 누구나 후회막급이지요.

 

  (3) 결혼, 천개의 고원: 친애하는 K, 결혼이란 그 자체 사랑의 완성을 갈망하는 상입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찬란한 웨딩마치를 꿈꾸지 않습니까? 따라서 결혼식은 인간 삶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도 고매한 순간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쁨의 깊이이지, 기쁨의 양이 아닙니다. 따라서 단 한 번 결혼이냐, 리즈 테일러처럼 열 번 결혼이냐? 등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를 고려할 때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든가 “결혼은 인생의 죽음이다.”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는 부분적으로 타당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장님 코끼리 더듬는 데에서 비롯한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삶이 고통스러우면, 그것은 “자신이 처한” 사랑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이지, 사랑의 삶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사랑의 삶을 개척해야 합니다. 자신의 행복을 능동적으로 추구해나가는 자가 인간이니까요. 

 

(4) 나의 충고 하나: 친애하는 K,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 사항을 충고하고 싶습니다. “일상 삶에서 가급적이면 이타주의자로 살아가되, 사랑의 삶에서 가급적이면 이기주의자로 살아가라.”는 게 나의 충고입니다. 주위의 어렵고도 불행한 사람을 돕고 살아가는 것은 인간 삶의 미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일상 삶에서 이타주의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약화시키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삶에 대해서만은 (설령 남들이 얄밉다고 손가락질하더라도) 이기주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자신의 감정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사항입니다. (그렇지만 인간 삶은 수많은 색깔로 이루어진 팔레트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뜻과는 달리 살아가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데 할 수 없도록 강요하는 현실적 정황 - 이것이 인간을 비극적으로 몰아갑니다. ㅠㅠ) 

 

(5) 사랑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결혼을 택할 때 자신의 내적 감정을 가장 중시해야 합니다. 당신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결혼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중매를 통해서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내 감정의 솔직한 자세야 말로 결혼 선택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a) 사랑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b) 부모가 원하기 때문에, (c) 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d)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결혼을 택하는 자는 불행하게 살거나,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친애하는 K, 결혼 전에 당신은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없습니다. 가령 마음에 드는 모든 사람들과 동침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문학 서적 등을 통한 간접 경험 등을 통해서 어떠한 타입이 자신과 맞는지 미리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6) 호프만슈탈의 극시: 오늘은 당신에게 부모의 뜻대로 결혼했다가 비극을 맞이하는 문학 작품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신낭만주의 작가에 해당하는 후고 폰 호프만슈탈 (Hugo von Hoffmannstahl, 1874 - 1929)의 극시, “소베이데의 결혼 (Die Hochzeit der Sobeide)”이 바로 그 작품입니다. 호프만슈탈처럼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멋지게 문학적 현실을 형상화시킨 작가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호프만슈탈이 1899년에 베를린과 빈 극장에서 초연하게 한 작품으로서 남한에서 아직 번역 소개된 바 없습니다. 작가는 이미 2년 전에 “젊은 여인 (Die junge Frau)”라는 제목으로 극작품을 구상한 바 있었습니다.

 

 후고 폰 호프만슈탈 (1874 - 1929)

 

 

(7) 비극의 발단: 이제 극시의 줄거리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주인공 소베이데는 무척 아름다운 젊은 여인입니다. 그렇지만 그미의 부모는 경제적으로 곤궁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부모는 딸을 어느 상인에게 시집보냄으로써, 장차 사위가 될 사람으로부터 약간의 경제적 도움을 받으려고 의도했던 것입니다. 신랑은 매우 영리하고, 현명하며, 부유하지만, 약간 나이가 많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습니다. 소베이데는 결혼 첫날밤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미는 결혼 전에 한 번도 남자와 포옹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는 신랑이 아니었습니다. 소베이데는 가넴 (Ganem)이라는 남자를 사랑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작은 세탁소를 운영할 정도로 가난한 것 같았습니다. 친애하는 K, 깊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슴지 않고 사랑을 고백하기란 너무나 어렵습니다. 사랑에 빠진 자는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냉가슴만 끙끙 앓고 있으니까요. 소베이데 역시 그러했습니다. 가넴을 만나곤 했지만,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으며, 한번도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없었습니다. 

 

(8) 버림받은 인간의 내면은 결코 버림받을 만하지는 않다: 소베이데는 첫날밤에 남편에게 자신의 처지와 감정을 그대로 고백합니다. 즉 자신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결혼하게 되었으며,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말합니다. 이때 남편은 깊은 절망감에 빠집니다. 그는 신부에게 다시 한번 설득해 봅니다. 그래도 결혼했으니, 자신과 함께 살 수 없는가? 하고 물어봅니다. 그러나 소베이데는 사랑을 포기할 수 없음을 분명히 전합니다. 신랑은 한 시간 숙고하다가, 한 가지 결론을 내립니다. 그것은 결혼의 무효를 선언하고, 아무 조건 없이 신부를 그냥 떠나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신랑은 무척 영리하고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랑 없는 아내에게 사랑을 구차하게 “구걸”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자고로 “버림받은 남자 (Hahnrei)”가 자존심 다 팽개치고 임을 편안히 떠나보내는 일은 무척 어려운 법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악착같이 특정 여자에게 집착하는 남자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소베이데의 남편은 아내에게 아량을 베풀며, 그미에게 자유를 부여합니다. 

 

(9) 여자의 열정은?: 친애하는 K, 여자의 힘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사랑의 힘이라고 누가 말했던가요? 남편으로부터 자유 (?)를 되찾은 소베이데는 자신의 설레는 마음을 하루라도 감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미는 바로 그날 밤 혼비백산할 정도로 신속하게 가넴에게 달려갑니다. 그러나 그미는 가넴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꿈이 놀랍게도 현실화 되었지만, 지금까지 현실로 믿었던 내용이 그저 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가넴의 아버지는 세탁소 주인이 아니라,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태를 향락으로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가령 돈과 여자들에 대한 집착이 부유함의 권태를 떨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이었습니다. 소베이데는 난생 처음으로 가넴의 집을 찾아갑니다. 집은 과히 궁궐과 같았습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재화와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으니까요. 가넴의 아버지는 수많은 고혹적인 여자들 가운데에서 특히 요염한 여자, 귈리스타네를 총애하고 있었습니다.

 

  (10) 남자 꼬시기: 또 다른 여자 귈리스타네는 누구일까요? 그미는 아름답고 젊지만 사악한 과부였습니다. 남편이 죽은 뒤에 그미는 가넴의 아버지를 저작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순간적으로 욕정이 불타오릅니다. 그것은 육체적 사랑이라는 놀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귈리스타네는 가넴 아버지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습니다. 문제는 그미가 가넴의 아버지의 재산을 은밀히 탐할 뿐 아니라, 아울러 아름다운 젊은 아들, 가넴을 자신의 애인으로 만들려고 작심했다는 데 있습니다. 귈리스티아네는 가넴 아버지가 시내로 떠날 경우에는 항상 가넴의 침실로 향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가넴은 아버지의 연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었지만, 자청해서 달려는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을 뿌리치지는 못했습니다. 소베이데가 가넴을 만나려고 찾아왔을 때, 귈리스타네는 이를 허용할리 만무합니다. 그미는 주인공을 문전박대하고 쫓아냅니다.

 

 

 

 

(11) 사랑이 뭐 길래, 자살하는가?: 친애하는 K, 당신은 아시는지요? 연애 경험 많은 젊은이가 나중에 얄미울 정도로 잘 살아가고, 경험 없는 젊은이일수록 거대한 사랑을 꿈꾸다가 실제 현실에서 커다란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실패를 통해서 사랑과 이별로 인한 고통을 견뎌내어야 합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실패를 통해 인간은 더욱더 원숙하게 되는 법입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베이데는 사회 경험이 없는 젊은 요조숙녀였습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기는커녕, 임의 계모로부터 엄청난 수모를 당했습니다. 이를 감당하기에는 그미의 마음은 너무나 유약했습니다. 그미는 다시 남편에게 되돌아 와서 그날 밤 어느 탑에서 뛰어내려 아까운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환상에 사로잡힌 채 허상의 젊은 남자 한사람을 사랑하며 살다가, 실제 현실에서 남편으로부터 사랑 받을 기회마저 빼앗긴 주인공 - 그미는 마지막으로 남편의 품에 안겨서 서서히 죽어갑니다.

 

  (12) 문제는 실천이다: 친애하는 K, 당신은 소베이데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소베이데의 잘못 혹은 약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경험 부족 탓일까요? 아니면 사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신비로운 연심 (戀心) 때문일까요? 어쨌든 소베이데는 아마도 사랑하는 감정에 눈이 어두워, 사랑하는 임의 구체적 삶을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소베이데처럼 그렇게 수동적으로 살아가지 마세요. 사랑이라는 삶의 늪에 깊이 몸을 담그길 바랍니다. 부디 아름다운 분을 스스로 찾아서, 그 (혹은 그미)를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설령 실패하더라도 아랑곳 하지 마세요.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대신에 사랑의 실천을 위한 한 가지 전제 조건을 잊지 마세요. 그것은 -빌헬름 라이히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말한 바 있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임이 오로지 돈과 권력만을 추구하는 속물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