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20전독문헌

서로박: 무질의 '우유부단한 퇴를레스의 혼란'

필자 (匹子) 2023. 7. 25. 10:15

로베르트 무질의 "우유부단한 퇴를레스의 혼란 (Die Verwirrungen des Zoeglings Toerless)"은 1903년에 완성되어 1906년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무질의 유일무이한 성공작이었지만, 처음에는 출간에 우여곡절을 겪다가 알프레트 케어 (Alfred Kerr)의 주선으로 간신히 간행되었다. W.에 있는 일류 학교에서는 기숙사 시설을 갖춘 채 특권층의 아이들을 교육시킨다. 그렇지만 우유부단한 퇴를레스는 처음부터 이 학교의 생활에 고통을 느낀다. 소설의 서두는 “미학적이자 지적 특성”을 지닌 퇴를레스의 성격 그리고 학교의 사회적 제도 내지는 규약 사이의 구조적 갈등을 지적하고 있다. 작가는 현실의 객관적 조건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므로, 이는 거의 묘사되지 않고 있다.

 

작가는 주인공의 내면적 성찰을 추적하며, 오로지 주인공의 심리의 급진적 주관성을 불러일으키는 갈등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아이의 갈등은 소설의 핵심적 모티브로 작용하는데, 나중에 사춘기의 “혼란”을 유발시키고, 자신의 고유한 자기 결정권을 스스로 택하는 방향으로 끝을 맺는다. 󰡔퇴를레스󰡕는 개인의 자전기와 같은 소설이므로, 결국 교양 소설의 유형에 해당한다. 기숙사의 낯설고 제도화된 환경에 대해 퇴를레스는 부모의 보호를 받으려는 일종의 향수를 느낀다. 퇴를레스의 심리 속에는 어떤 상상적인 현실에 대한 동경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주어진 현실적 상과 대립되며, 주인공의 마음속에서 어떤 분열을 일으킨다. “향수”란 서술자에 의하면 어떤 “영혼의 힘”으로 간주된다. 영혼의 힘은 처음에는 다만 “고통의 핑계로서” 출현할 뿐이다.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이러한 “향수”의 느낌은 퇴를레스의 마음 속에서 사라진다. 주인공은 “때로는 무척 거칠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두 명의 동급생 친구, 바이네베르크와 라이팅을 사귄다. 주인공 퇴를레스는 친구의 동물적 본능에 대해 한편으로는 솔깃한 마음을 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혐오한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자아의 균열 상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퇴를레스는 주어진 현실을 마치 동경하는 환상으로 얼룩진 상 속으로 편입시킨다. 환상으로 얼룩진 상에는 희미하게나마 어떤 성적인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끔찍한, 그러나 황홀한 동물적인 성욕”을 무의식적으로 기대한다. 퇴를레스는 마을에서 일하는 나이든 창녀 보체나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내면적으로 기대하던 욕망을 시험해 보기도 한다. 보체나를 통하여 주인공은 시민적 윤리가 거부하는 성적 판타지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미와의 관계는 자신의 자아 균열 상태를 극복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물론 주인공의 일상적 버릇을 파괴시키는 것은 “동물적 본능”이 아니라, 오히려 동급생 바지니의 “도벽”이었다. 바이네베르크와 라이팅은 모든 것을 비밀로 덮어두자고 주장한다. 두 사람의 견해에 의하면 바지니를 감시하여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퇴를레스는 처음부터 자신의 성적인 판타지 그리고 바지니의 도벽 사이의 어떤 내적 유사성을 예측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바지니처럼 시민주의 교육의 윤리적 태도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은 바지니와 같은 갈등을 느끼고 있다.

 

처음에는 그저 희미한 느낌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규범에 위배되는 성 (성(性)은 퇴를레스의 상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퇴를레스는 규범에 위배되는 성을 바지니에게 투영시킨다. 이로써 그것은 “삶 속으로의 환상”에서 벗어나, 위협적인 무엇으로 변모된다. 그렇기에 바지니는 주인공에게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바이네베르크와 권력지향적인 라이팅은 처음에는 함께 바지니를 “고문”하려고 작심한다. 이와 관련하여 퇴를레스는 그러한 사디즘의 행위에 동조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다른 사람의 사정에 대해 전혀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아직 깨닫지 못하는) 감정의 비윤리성에 대한 정보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그는 바지니를 육체적으로 괴롭히지 않고, 심리적으로 괴롭힌다. 이로써 바지니는 스스로 무엇을 했는가? 하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주인공은 바이네베르크와 라이팅 사이의 동성연애에 관해 상세히 알고 싶어 한다.

 

바지니는 자신의 도둑질이 어떤 더 이상 질문 던질 수 없는 숙명과 같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퇴를레스는 (그러니까 작가 무질은) 금지된 행동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일은 숙명의 둔탁한 인과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영혼”의 이해될 수 있는 인과율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볼 때 바지니는 심리적 심층 부분을 상실해 있다. 공교롭게도 바지니는 퇴를레스를 성적으로 유혹한다.

 

이때 퇴를레스의 마음속에 위협적 느낌은 사라지는 듯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적으로 결합하지 못한다. 왜냐면 퇴를레스는 다시금 자아 분열의 어떤 상태에 갇힌 채, 부끄러움을 느끼고, 바지니의 새로운 열정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분열된 자아의식 속에서 위기감을 맛본다. 바지니는 작가가 확신하건대 어떤 “목표 없는 굶주림”에 의해서 마구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방황은 말하자면 “개인의 목표로서 미리 정의될 수 있는 무엇”을 실현하는 일을 달성하기 위한 과도적 행위이다. 개인의 목표는 “문화적 자율성”인데, 이것은 “영혼과 정신의 성장” 내지는 “열정적 내면의 성장”에서 표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퇴를레스의 위기는 다음의 사실로 끝을 맺는다. 즉 바이네베르크와 라이팅은 바지니를 다른 친구들에게 넘기기로 결심한다. 학생들은 공개 재판을 통하여 바지니를 위협한다. 퇴를레스는 자신의 태도를 변명한다. 그러나 두 친구 사이의 그리고 자신과 바지니 사이의 동성연애 관계에 대해서는 교묘히 발설하지 않는다. 퇴를레스는 학교의 교장 그리고 교사들 앞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모조리 털어놓는다.

 

이때 퇴를레스는 자신의 마음속에 담긴 급진적 자아를 파악하기 시작한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압박해오던 윤리적 인습과 비인간적 교육의 행태 그리고 자신 사이에 도사린 갈등을 실질적으로 깨닫는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주위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한다. 소설은 전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상황, 구조적으로 정해진 갈등의 증상 등과 같은 여운을 남긴 채 끝난다. 퇴를레스는 영재 학교를 떠나기로 작심하였고, 교사들 역시 그를 퇴교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러니까 퇴를레스는 더 이상 하나의 체제 하에서 교육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