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프리츠 루돌프 프리스의 '브라디스라바의 수녀들'

필자 (匹子) 2012. 10. 4. 10:01

분명히 동독 출신의 작가, 프리츠 루돌프 프리스의 뇌리에는 수많은 가능성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작품에 묘사되는 이야기는 대체로 그의 상상력에 의해서 직조된 것이니까 말이다. 마치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사이에 독서계를 주름잡던 작가, 마테오 알레만 (Mateo Alemán 1547 - 1613)이 20세기에 다시 태어난 것처럼 여겨진다. 마테오 알레만 은 에스파냐의 작가로서 세계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악한 소설, 『알파라치의 구즈만』을 집필 발표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간행된 지 6년 만에 유럽 전 지역을 휩쓸다시피 하였다. 그런데 프리스의 작품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는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다. 문제는 오늘날의 독자의 독서 욕구를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인데, 프리스의 작품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알레만의 작품, 『알파라치의 구즈만』은 금욕적이고 가톨릭 종교에 몸을 바친 필립 11세가 사망한 뒤의 염세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 때문에 작품은 동시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다. 물론 프리스의 소설이 전환기 사회의 분위기 내지 배경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작품이 너무 전문적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독자들이 쉽사리 다가가지 못할 정도이다. 실제로 프리스는 암시, 철자 퀴즈라든가 신비로운 문학적 수수께끼를 실험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오로지 독문학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프리스의 소설은 일관된 줄거리를 지니고 있지 않아서 요약하기가 무척 힘이 든다.

 

주인공 나는 어느 날 세비야에서 깨어나서 자신이 작가 마테오 알레만이라고 굳게 믿는다. 간주곡으로 도입된 짤막한 장이 끝난 다음, 주인공은 알렉산더 레타르트 박사의 팀과 함께 뚜렷한 계획 없이 전 유럽을 이리저리 방황한다. (독자는 알렉산더 레타르트가 이전의 작품 『알렉산더의 새로운 세계들』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두 사람은 마치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방불케 한다. 누가 돈키호테이며, 누가 산초 판사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함부로 대답하기 곤란하다. 문제는 마테오 알레만 문학상이 지금까지 소설을 한 편도 발표한 적이 없는 어느 러시아 시인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이때 성스러운 종교 재판소가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되는데, 동서독의 등산모임에 속하던 사람들이 이를 방해하기 위하여 어떤 간계를 꾸민다. 이를 위해서 어떤 유령의 단체가 결성된다. 어쨌든 소설의 줄거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책이다. “브라티슬라바의 수녀들”은 아무런 의미 없는 이야기인데, 제목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여성은 프리스 소설에서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지만 여성들의 역할은 언제나 애증이라는 모순관계 속에서 언급되고 있다. 나디아, 라시, 뮐렌베크 부인 등이 그들이다. 특히 뮐렌베크 부인은 지난 몇 년 동안 동독 작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NDR 문학 편집자로서 활동하다가 비극적으로 자살한 기젤라 린데만을 연상시킨다. 소설은 그미에게 헌정되어 있다. 작품은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출발」, 「집에서」 그리고 「오래된 그리고 새로운 세계」가 바로 그러한 단락들이다. 뒤이어 네 번째 단락 「두 개의 편지」가 후기 형식으로 첨부되어 있다. 여기에는 여러 작가들의 발언이 마치 짜깁기 식으로 이리저리 첨부되어 있다. 이는 작가의 문학적 자세를 강화해주는 역할 뿐 아니라, 작가가 동경하던 과거 작품에 대한 동경이라든가 작가의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작가는 주인공 마테오 알레만을 등장시켜서, 브레주네프, 고르바초프, 호네커,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품은 동경의 풍자극으로 설명될 수 있단 말인가? 마지막 대목에서 파우스트의 천국 여행과 유사한 내용이 드러난다. 이는 괴테, 하이너 뮐러 그리고 이름트라우트 모르그너에 대한 패러디로 이해될 수 있다. 레타르트는 언제나 떠나 있지만 가끔 유령처럼 다가오는 팔라초 프로초에서 독일 민주 공화국 (동독)을 외친다. 마치 악몽처럼 이러한 현재의 장면은 다시금 과거의 현실로 전환되고 있다. 기억은 흐릿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 레타르트는 자신의 이름에 모든 명예를 부여하지만, 과연 그가 자신의 소원대로 역사와 끔찍하게 단절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는 이러한 생각을 자신의 이름처럼 “지연시키면서” 역사와 동행하게 될까? 이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작가의 놀라운 교양으로 탁마된 두터운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난 다음에 그다지 즐거운 마음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 문학의 형식이 어느 특정한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 얼마만큼 독자적으로 기능하는가? 하는 문제는 작품 속에 너무 강하게 출현한다. 프리스는 풍요로운 상상력의 상호 유희를 부단히 즐기고 있다. 만약 이러한 유희에 대항하는 체제옹호주의자들이 다른 방식으로 소설 속에 전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상상에 입각한 현실이 실체 현실의 무엇을 비춰주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집요하게 추적해 나가야 할 것이다. 만약 실제 현실이 더 중요한 것으로 판명될 경우에는, 그러한 비밀의 문학은 즐거움의 자극을 상실하게 될지 모른다.

 

프리스는 마치 동독이 여전히 존재하여 억압 메커니즘의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그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구동독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마테오 알레만이 그림멜스하우젠의 『짐플리치시무스』의 모범이 되는 소설인『알파라치의 구즈만』을 집필하고 있을 때, 작가는 악한 소설의 사회 풍자를 중세의 설교 문학적 전통과 묘하게 결합시켰다. 이에 반해서 프리스는 어떠한 신앙도 철학적 신념도 작품 속에 설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풍자로 적절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현실 풍자가 지나간 구동독으로 국한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나아가 그의 문장과 사고는 공격 그리고 암시, 기괴함 그리고 “비가” 사이를 오가고 있다. 작품은 어느 누구도 정신적으로 거주하지 않는 곳을 추적할 뿐이다. 그렇기에 독자가 그의 작품을 읽고 공감하기란 참으로 힘이 든다. 제 아무리 깊은 내용을 담고 있으면 무엇 하는가? 만약 그게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작품은 조만간 망각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가 죽는 순간에 기억이란 우리의 적이며 우리의 재판관입니다.”하고 레타르트는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망각의 구렁덩이로 밀쳐져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