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냐에 있는 벤야민의 묘비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기원을 철학적으로 상세히 규명해 보도록 하자. 벤야민은 알레고리 개념을 수미일관 추적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간과했던 “기술적 용어 (terminus technicus)”에 자신의 고유성을 부여하는 작업일 뿐 아니라, 알레고리 자체가 결국 인식 이론적 카테고리로 화하고 있다.
자고로 인간의 제한된 주관적 인식 능력 그리고 인식될 수 없는 객관적 진리의 내용 사이에는 분명히 간극이 있다. 이는 칸트 (Kant) 이후로 이어진 철학적 전통이기도 하다. 그러나 벤야민의 비평의 개념은 이러한 간극에 대해 하나의 이의를 제기한다. 인식은 무언가 지향하려는 소유와 같은 무엇으로서, 의향 없는 존재로서의 진리로부터 상당히 제한 당하고 있다. 이 경우 진리는 인식하려는 주체가 아니라, 객관적 존재 속에 머무는 셈이다. 진리를 방법론적으로 찾아내는 행위는 벤야민에 의하면 의식의 일원성을 창출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이미 주어진 (결코 인위적으로 창출되지 않은) “존재 속의 일원성”을 언어적으로 밝히는 작업이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 속의 일원성은 이념의 영역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서, 플라톤이 언어철학적으로 “재기억 (Anamnesis)”으로 강조한 바 있는 무엇이다. 철학 비평은 “명칭 (언급하는 인식 행위)” 그리고 “사물 (객관적 진리)”에 관한 잃어버린 동일성을 재발견하는 일을 고유한 기능으로 삼는다. 우리는 이러한 사항을 언어의 상징적 특성 속에서 알게 된다. 즉 언어의 상징적 특성 속에서 이념은 스스로 이해될 수 있다. 신격화된 언어로서의 이념들은 모든 사라진 원초적 기억을 처음으로 청취함으로써 재생산될 수 있고, 또한 반드시 그래야 한다. 따라서 진리는 스스로 표현되는 이념들의 “소멸 그리고 사라짐”으로서의 의향 없는 인식을 통해서만 발견 가능하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념들의 존재는 결코 어떤 직관의 대상으로서, 어떤 지적인 대상으로서 생각될 수 없다. 진리는 어떤 상대성, 나아가 주체의 의향하는 특성에 의해서 출현하는 법이 없다. 개념화된 의향 속에 정해진 것으로서의 인식 대상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진리란 이념들 속에서 형성된 의향 없는 어떤 존재이다. 따라서 진리에 합당한 것은 인식 속에서 상정된 무엇이 아니라, 이념들 속에서 사라지고 소멸되는 무엇이다. 진리는 의향의 죽음이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모든 예술 비평의 기능은 벤야민의 견해에 의하면 모든 예술 형태라고 말할 수 있는 이념의 자기 표현을 언어적으로 밝혀내는 일이라고 한다. “비애극이란 예술 철학적 논문의 의미에서 하나의 이념이다.”
바로크 비애극의 이념은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이념을 언어적으로 형체화시킬 때 벤야민은 적절한 표현 형태로서 알레고리를 찾아낸다. 알레고리는 부분적으로 파괴되고 완성되지 않은 무엇이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완성되기 위해서 자신 바깥으로 향해 충동한다. 이 점에 있어서 알레고리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알레고리는 변증법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변증법은 알레고리의 비애극의 “폐허적 특성”을 그대로 표현해준다.
적어도 알레고리 자체가 완성에 대한 필요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죽음의 폐허 그리고 영원성, 소멸 그리고 부활, 파편적인 무엇 그리고 전체성 사이의 지속적 변증법의 긴장관계 속에 자리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바로크 예술의 가장 강인한 모티브는 한편으로는 사물의 소멸에 관한 입장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을 영원성으로 구출하려는 입장이 아닌가? 알레고리의 그러한 변증법은 고전적 상징성 속에 토대를 두고 있는 “전체성에 관한 거짓된 상”을 문제 제기하려는 의도에서 거론되고 있다.
바로크 비애극과 고대 그리스의 비극 사이의 차이점은 역사적 내용에서 드러나고 있다. 바로크 비애극은 역사를 “세계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로 표현한다. 그러한 한 바로크의 비애극은 분명히 하나의 알레고리이다. 비극적 내용은 바로크 극작품에서 어떤 정치적 사건의 시대적 역동성의 차원이라기 보다는, 영구한 파멸의 하나의 자연적 파국으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바로크 비애극의 핵심적인 공간은 궁정이다. 바로크 비애극의 알레고리의 구조는 역사적 파멸 그리고 메시아의 구원 사이의 어떤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긴장관계는 알레고리의 인물로 등장하는 자의 변증법적 유형과 일치한다. 이러한 유형은 군주 그리고 궁정 신하로 요약될 수 있다.
군주 그리고 신하 등과 같은 등장 인물들은 내면에 비극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다. 바로크 예술에서 폭군 그리고 순교자는 야누스의 머리통으로 묘사된다. 이는 인식론적으로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로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로 군주는 역사의 변화를 제지하는, 모든 것을 질서로 정하려는 인물로서, 주체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객체를 지니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제한된?) 인식 능력으로써 사물들을 임의로 장악하는 주체와 유사하게 행한다. 일반 백성들이 폭군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폭군은 자신의 역할을 규정하는 신성 불가침의 신적 에너지 그리고 자신의 제한된 세속적 에너지 사이에 불공평함이 존재한다고 스스로 인식한다. 그리하여 그는 신의 입장에서 고찰할 때 순교자가 돌변한다.
궁정 신하 역시 모든 것을 깨닫고 사물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궁정 신하는 성자일수도 혹은 간신일 수도 있다. 신하는 권력의 힘을 비는 게 아니라, 절대적 정신의 형태로 모든 것을 장악하려고 한다. 궁정 신하의 이러한 절대적 주관성을 인식하는 관객의 마음속에는 슬픔이 솟구칠 수 있다. 왜냐하면 궁정 신하의 발언은 객체가 그대로 드러내는 사실 내용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과도하게 명명하는 알레고리의 행위는 그 자체 인식의 나무가 베푸는 결실과 같다. 적어도 그것이 과거에 아담이 거주하던 (사물과 언어가 일치되던) 천국의 상태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그대로 지적해준다면, 그러하다.
벤야민은 절대적으로 유물론적인 것과 절대적으로 정신적인 것을 사탄 영역의 두 양극으로 표현한 바 있다. 가령 벤야민이 1916년에 쓴 초기 논문, 「언어 자체 그리고 인간의 언어에 관하여 (Über Sprache überhaupt und über die Sprache des Menschen)」를 참고하라. 의식의 개념적 일원성 뿐 아니라, 존재의 직접적인 일원성으로서의 진정한 종합은 오로지 구원적 역사의 도래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다. 구원의 역사가 진정으로 도래하게 되면, 추상적 주관성은 자신의 추상성 속에서 파기될 것이며 (이로써 알레고리의 과도한 명명 자체가 불필요하게 되고) 경직된 사물의 질료가 무언가 발언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구원의 역사가 도래한다는 것은 객체와 주체의 화해를 뜻한다. 이러한 화해는 알레고리의 변증법적 구조 속에서 이미 도사린 것으로 판명된다. 알레고리는 자신의 단편성 그리고 파편성 속에서 스스로 완성되고 스스로 구원되려고 애쓴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그러하다. 바로크 비애극이 결론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한마디로 기적이다. 기적은 알레고리의 완성이자, 동시에 알레고리의 파기이다. 추상적 주관성 그리고 죽은 질료성은 피상적 특성에 의해서 필연적인 것으로 판명된다. 그것은 사실 그리고 의미 사이의 동일성으로서의 진리, 주체 그리고 객체의 균열에 대한 극복으로서의 진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두 개의 한국어 판본이 있다. 1. 발터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조만영 역, 새물결 2008. 2. 발터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김유동 최성만 역, 한길사 2009. 필자는 조만영의 번역을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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