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스글라스 2

모제스 로젠크란츠, 혹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쓰기 (3)

7. 얼마 지나지 않아 파울 첼란은 심리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는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표절 시비 때문이었다. 가령 이반 골 (Ivan Goll, 1891 - 1950)의 아내, 클레어 골은 첼란이 1953년에 간행된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서 죽은 남편의 시구를 마구 베꼈다고 주장하였다. 시적 표현들은 우연히 비슷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다른 작품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작품을 쓸 수도 있다. 굳이 잘못 아닌 잘못을 찾는다면 그것은 체험현실이 동일하다는 데에서 발견되는 문제일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 전후 독일 문학에서 명작으로 손꼽히는 시, 귄터 아이히 (Günter Eich, 1907 - 1972)의 「소지품 목록」이 체코의 시인 리하르트 바이너 (R. Weiner, 1884 - 1937)의..

22 외국시 2021.10.21

모제스 로젠크란츠, 혹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쓰기 (1)

“아내여, 내가 죽으면, 당신에게 유산으로 남길 게 있어. 그건 나의 발이야. 내 발은 아주 억세고 잘 생겼어. 동쪽 발이거든. 서유럽에서는 이런 발을 볼 수 없을 거야. 어릴 때는 맨발로 눈 덮인 들판을 뛰어다녔고, 수감되어 있을 때는 동토의 땅을 맨발로 걸어야 했어. 거기에는 자갈과 뾰족한 돌들이 많았지. 고문 형무소에서, 우라늄 탄광 속에서도 나의 발은 한 번도 다친 적이 없거든. 발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고난의 삶을 헤쳐 나오지 못했을 거야.” 모제스 로젠크란츠 (Moses Rosenkranz, 1904 - 2003)는 95세 생일에 그렇게 말했다. 로젠크란츠는 1904년 부코비나의 작은 마을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유대인의 여섯 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외감, 가난, 냉대 등은 그의 입을 굳게 다물게..

22 외국시 2021.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