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리케 3

박설호: (1) 흙의 권리. 오르플리트 서한집, 서문

“흙은 살림의 자양이고, 핵폐기물은 죽임의 원자재다.” (에티엔 다보도)“흙의 권리는 유한한 생명의 처절함으로, 여성성의 우선권으로, 물질의 중요성으로, 죽음의 소중한 가치로 설명된다.” (필자) 1. 친애하는 M,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미지의 독자,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대의 상처를 내밀하게 전하는 데에는 서간체가 가장 좋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청년이었을 때,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 Бедные люди』 (1844/45)을 읽고, 깊은 감동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비록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상대방을 깊이 애호하는 마카르 제브시킨 그리고 경제적 이유로 돈 많은 다른 사내를 선택해야 하는 바바라 도브로요브스카 사이의 이별은 참으로 애절한 것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

2 나의 잡글 2024.06.13

서로박: 뫼리케의 '오르플리트 나의 땅'

에두아르트 뫼리케 (1804 - 1875)의 초상화 친애하는 J,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고향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인에게 고향은 시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고향은 유년의 시기에 보냈던 정겨운 공간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고향은 대체로 시인이 고유하게 체험했던 과거의 공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목사, 시인으로 살았던 에두아르트 뫼리케 Eduart Mörike (1804 - 1875)에게 고향은 자신이 실제로 살았던 유년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고향은 지상에서 발견될 수 없는 곳이었으며, 그의 젊은 친구들 (루드비히 바우어, 빌헬름 바이블링거)과 함께 가상적으로 상상해낸 이상의 장소였습니다. 뫼리케는 그 장소를 “오르플리트 Orpl..

21 독일시 2023.09.24

블로흐: 문의 모티프 (2)

그렇지만 문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결코 여러 가지 구상적인 상을 통해서 드러나지도 않으며,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한다. 세계는 언제 어디서든 간에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말없이 나타나 것은 오로지 아주 드문 행복의 감정일 뿐이다. 그렇지만 행복의 감정은 외부로 향해서 확장되고 넓게 퍼져나가는 게 아니라, 대부분 신앙에서 나타나듯이 기껏해야 “상부”로 향해 방향을 설정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라지는 장소 또한 행복의 신들이 자리하는 공간이 아니라, 끔찍한 경악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인지될 수 있다. 문의 배후가 어떠한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추론하고 예견하는 방식으로 유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경악이나 희열을 안겨주는 현실적인 영역을 뛰어넘는, ..

28 Bloch 흔적들 2021.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