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의 시

박설호의 시, '몽양 여운형'

필자 (匹子) 2024. 12. 23. 08:59

몽양 여운형

박설호

 

여보게 지근이 자네가 *

혜화동에서 나를 향해

총을 발사했을 때 마지막

세상은 뒤집혀 보였지 드디어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솟았지 피 흘리며 쓰러진

나를 애처롭게 내려다보던

가로수 놀란 아이들

얼씨구 어찌 통한의

무지막지한 거사를

감행했는가 어떤 연유에서

그토록 소름 끼치는 증오를

삭이지 못했는가

 

자네를 용서하겠네

목숨은 문의 연결고리

어차피 떠날 몸 미련은

없어 다만 새로운

나라 바로 세우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일 뿐 세상은

내 몸에 열두 번이나

지망지망 죽음의

덫을 놓았지만 절씨구

내 몸을 불사르게 한 것은

종이 주인이 되고 여자가

사람으로 대접받는

참 세상의 꿈이었어

 

여보게 지근이 무엇이

그토록 죽임이라는 살벌한

불을 댕기게 했는가

자네를 팔불출 지렁이로

살게 한 굶주림과

꽉 막힌 무지 때문인가 나의

처절한 걸음은 그렇지

자네 같은 흰옷들의

살림 때문이었는데 다음

생에는 휘뚜루마뚜루

자네 같은 조무래기들에게

칼부림보다 글이나

가르치고 싶다네

 

......................

 

* 여기서 언급되는 자는 여운영 선생을 살해한 한지근(韓智根)을 가리킨다. 그의 본명은 이필형(李弼炯)이다. 한지근을 사주한 범인들은 1945년 12월 30일 독립운동가 송진우의 암살 주범 한현우의 집에 모인 극우파들이었다.

 

 

몽양 여운형 선생 (1886 - 1947)

 

 

여운형 선생이 살해되던 혜화동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