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의 시

박설호의 시, '상처 입은 장비로구나'

필자 (匹子) 2024. 10. 8. 10:35

상처 입은 장비로구나

박설호

 

 

가랑비 무시로 내리다 등에 아기 업은 채 삼지창을 높이 들고 이자 강을 터벅터벅 건너다 뒤에는 아내가 옷고름 풀어헤친 채 병아리 걸음으로 올망졸망 걷다 앞에는 백인 무사들 낯설게 보이는 우리에게 독침 날리다 행여나 갓 태어난 아들이 다칠까 두 팔 허우적거리며 방어하지만 비틀거리며 미소 흘리는 아내가 다치면 어이 할꼬

 

영국 공원 그늘 아래 잠시 휴식 취하며 공자의 쪽지를 꺼내어 정독하다 “안회야, 네가 자랑스럽구나. 하찮은 음식, 더러운 골목에 살지만, 너는 배움에 항상 행복해하는구나.”* 불현듯 안회가 꿈에 나타나 나를 꾸짖다 어리석은 짓거리 답습하지 말라고 이제 절반 달려왔는데 노잣돈과 식솔들이 앞길을 가로막는구나

 

당장 되돌아갈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눈안개 가득 피어 있는 토이토부르크의 불청객으로 주저앉을 수 없지 않은가 가꾼 사과나무는 하나도 없고 나의 내공은 초보자 수준인데 상처 치료와 밥벌이로 허송하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낯선 이국땅 아몬드 눈알을 뒤집어쓴 채 벌렁 나자빠져 있는 꼬락서니 영락없이 상처 입은 장비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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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가 안회에게 전하는 말: “어질도다. 회여. 한 대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항에 있으면 사람들이 그 시름을 감내하지 못하거늘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아니하니 어질도다.” (子曰 賢哉 回也 一箪食 一瓢飲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楽 賢哉 回也 (論.雍也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