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3.
우선 작품의 내용에 관해 살펴보자. 산문 작품의 제목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곳”이라는 표현은 “유토피아”라는 풀어쓴 것이다. 그러니까 제목 자체가 보다 나은 미래 사회에 대한 작가의 요구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작품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대화는 유토피아에 관한 감추어진 토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문 작품의 제목은 얼핏 보기에는 체념이나 좌절감을 유추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는 작품의 주제와 관련시켜 본다면 전혀 비관주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암담하게 변해버린 현실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도전 내지는 작가의 저항 의식을 암시하고 있다. 본 작품은 실제로 19세기 초에 살았던 몇몇 사람들이 어느 다과회에서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는 하나의 일관된 줄거리가 없다. 대화의 중요한 내용은 대체로 예술의 가치와 영향력, 프랑스 혁명에 대한 제반 입장, 문명 비판 등으로 전개될 뿐이다.
다과회에 참석한 무명의 여류 시인 귄더로데는 다른 참석자들에게서 소외감을 느끼고 호흡 장애를 일으킨다. 귄더로데는 환담의 내용에 대해 답답함과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그렇기에 이 모임은 그미에게는 무의미한 모임에 불과하다. 귄더로데는 언제나 자기 가슴속에 단도를 지니고 다닌다. 우연히 단도가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자, 사람들은 놀란 듯이 그미를 바라본다.
클라이스트는 프랑스 혁명의 실패를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는 인간의 이상이 좌절된 현실에 환멸을 느끼지만, 인간의 이상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도중에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맨 처음 국경을 넘었을 때 나는 어떤 새로운 무엇을 경험했어요. 조국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더 조국이 아름답고 좋게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나 스스로 부여한, 해결할 수 없는 조국에 대한 의무감도 서서히 사라지는 느낌도 들었지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편안히 잠잘 수 있게 되었으며, 삶에 대한 새로운 용기가 마음속에서 솟아올랐으니까요. 갑자기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기이한 생각이 떠올랐어요. 어디로 가든 간에 나에게 주어진 행복의 꽃을 마음대로 꺾을 수 있다는 생각 말이에요. 바로 그 날 밤에 새로운 고향을 찾기로 작심하였습니다. 정말 그 날 밤을 결코 망각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었거든요.” (각주: Chr. Wolf: Kein Ort. Nirgends, Darmstadt 1983, S. 66.).
이 대목은 국가로부터 추방당한 바 있는 구동독 시인 볼프 비어만을 연상시켜주는 부분이다. 작가가 불청객으로서 다른 나라로 망명할 때, 맨 처음에는 해방감과 안도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핍박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조국에 대한 망령을 기억에서 떨쳐버리지 못한다. 비록 살고 있는 곳은 타국이지만, 그는 조국의 정치적 상황을 생각하며 고뇌한다. 한편으로는 조국을 사랑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국을 미워한다. (각주: 이는 어떤 사물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정서적 모순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거대한 권력의 희생물이 된다는 느낌은 사라졌으나, 그는 국가 권력에 의해 쫓겨난 자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다.). 어디 그뿐이랴. 낮선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의 처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작가의 상황은 클라이스트에게 그리고 비어만에게 공통되는 것이다. (각주: 이와 관련하여 김지하 시인의 춤추는 광대에 관한 비유를 참조하기 바란다. 김지하: 밥, 서울 1990, 111 쪽.).
클라이스트는 다과회에서 여러 사람들과 의견 대립을 경험하게 된다. 첫째로 클레멘스 브렌타노는 작가가 처해 있는 고립된 위기의 상황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적이고 종교적인 문제에 고착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브렌타노는 같은 작가라 하더라도 클라이스트의 현실 개혁적인 의지와 좌절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클라이스트의 고통은 사회적인 금기 사항이라든가 억압 구조에 기인한다. 클라이스트의 내적인 정서 및 내적인 행동 규범은 외부의 법, 관습, 도덕과 전혀 다르다. 이에 비하면 브렌타노는 이러한 괴리감을 느끼지 못한다. 고해의 삶은 브렌타노에게는 다만 종교적으로 주어져 있을 뿐이다.
둘째로 클라이스트의 주치의 정신과 의사 베데킨트는 클라이스트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는 클라이스트가 언어 장애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광기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베데킨트는 환자의 병이 사회적 병리 현상의 결과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비참한 사회적 상황이 클라이스트에게 병을 안겨주었는데도 말이다.
셋째로 법률가 사비니 역시 클라이스트와 의견 대립을 일으킨다. 클라이스트와 사비니와의 대화는 볼프의 소설에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사비니에 의하면 프랑스 혁명은 순수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철학을 기술된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인간의 삶을 이상적인 척도에 의해서 재단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이렇듯 사비니의 생각은 지극히 체제 안주적이다. 한마디로 사비니는 보수적인 현실주의자이다. 그에게 있어서 장 작 루소의 이상적 사고는 무언가를 선동하는 위험한 사고일 뿐이다. 사비니는 클라이스트에게 “프랑스로 가서 정말 루소의 흔적을 찾았나요?”하고 도전적으로 묻는다. 그때 클라이스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사람들은 철학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놓았으며, 그들이 사고하던 바를 실제 사고로부터 분리시켜 놓았지요.” 클라이스트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이상을 현실화시키려 노력하지 않고, 정반대로 뒤엎어버렸다는 것이다. (각주: 이러한 발언은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 하나는 “구동독 사회에서 체제 순응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클라이스트에 대한 구동독의 독문학 연구에 대한 비판이다. 이를테면 메링과 루카치는 클라이스트를 “미쳐버린 낭만주의자”로 매도하였다.).
넷째로 자연과학자 에젠벡 역시 클라이스트를 심하게 비난한다. 왜냐하면 클라이스트가 자연 과학의 맹목적 발전에 대해서 우려감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인류의 문화는 오성의 영역을 점점 넓혀가며, 상상력의 영역을 점점 좁혀가고 있습니다.” 에젠벡은 이러한 견해를 “우울증에 근거한 비탄적인 발언”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다과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클라이스트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클라이스트의 생각은 다과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서 “과격한 혁명을 동조하는 위험한 견해”로 취급되고 있다.
4.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곳"은 공간적으로 볼 때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소설의 전반부는 다과회가 개최되는 폐쇄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후반부는 주인공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와서 들판에서 나눈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 대한 내용을 세부적으로 언급하는 대신에, 몇 가지 중요한 관점들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관점들은 작가가 기리는 유토피아와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다.
첫째로 두 주인공의 갈등과 이상이 대화를 통해서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클라이스트는 귄더로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가끔 이렇게 생각해요. 자연이 만든 맨 처음의 이상적인 세계를 우리가 파괴한 뒤에는 그 세계는 아직 두 번 다시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든 조직에 의해서 이러한 이상적인 세계를 현실화 시킬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귄더로데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만약 우리가 희망을 저버린다면 틀림없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끔찍한 사태가 돌발할 거예요.” 두 사람의 이러한 발언은 작가가 기리는 바람직한 사회상에 대한 입장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장 쟈크 루소와 에른스트 블로흐의 인용문이다. 그러니까 크리스타 볼프는 루소와 블로흐의 말을 빌어 두 주인공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에 의하면 설령 역사 발전의 삼 단계가 실제로 이론에 상응하여 전개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유토피아를 무조건 폄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소설의 진행은 두 주인공의 건강 회복의 과정으로 파악될 수 있다. 작품의 전반부에서 클라이스트는 공포감과 발작에 시달린다. 귄더로데는 호흡 장애를 일으키고 심한 편두통 증세를 보인다. 이러한 병적 증세는 다분히 상징적이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대한 절망감, 자신의 작중 의도가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지 않는 데 대한 무기력함 등이 바로 (상징적인 의미에서) 병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대화를 통해서 두 사람은 자신의 심리적 충격에 대한 근원을 파악한다. 나아가 그들은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 뒤에, 상호 동류의식을 느낀다. (각주: Schoro Pak: Probleme der Utopie bei Chr. Wolf, Frankfurt a. M. 1989, S. 124f.).
셋째로 소설의 전반부에서 클라이스트가 다른 사람들과 나눈 대화에서는 전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다. 이에 비하면 두 주인공이 들판에서 나누는 대화는 자연스러우며, 두 사람 모두 작가로서의 신념 및 자신감을 재확인한다. 소설 전반부의 무대가 되는 메르텐의 살롱은 인간 의식의 폐쇄성을 상징하는 반면, 소설 후반부의 무대가 되는 들판은 개방성 내지는 인간적인 온화함을 상징하고 있다. 특히 후자는 자연과 태양으로 비유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두 시인의 작가로서의 자기 확인의 과정이나 다름이 없다.
(계속 이어집니다.)
'47 Wolf'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로박: (4) 크리스타 볼프의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곳' (0) | 2025.04.13 |
---|---|
서로박: (3) 크리스타 볼프의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곳' (0) | 2025.04.13 |
서로박: (1) 크리스타 볼프의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곳' (0) | 2025.04.10 |
서로박: 크리스타 볼프의 '남아 있는 것' (0) | 2024.08.05 |
서로박: 크리스타 볼프의 문학적 주제 (0) | 2024.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