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의 시

박설호의 시, '잠깐 노닥거릴 수 있을까'

필자 (匹子) 2025. 3. 29. 11:08

잠깐 노닥거릴 수 있을까

박설호

 

썩은 풀에서 생겨난 *

암컷 반딧불이가 말한다

 

모르니까 청춘이라고 아니 꽃봉오리에 옥시토신이 아직 없을 뿐이야 왜 꿈꾸면서 이빨을 갈겠어 그동안 너와 즐겁게 지낸 건 건 사실이야 손잡으면 껴안고 싶고 껴안으면 입 맞추고 싶으며 키스하면 한 몸이 되고 싶었지 하마터면 가슴 부풀어 뻥 터진 뒤에 꺄르륵 자물실 뻔했어 허나 그럴 수는 없지 않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아빠는 내가 흠결 없는 암술이기를 바라고 있어 너도 허청대지 말고 잘 먹고 잘 살아야지 날 찾지 마 안녕

 

비에 젖어 희미해진 *

암컷 반딧불이가 말한다

 

잘 지냈니 잠시 짬을 내어 나왔어 세월 참 빨리 흐르네 외국으로 떠났다는 소식 들었지 뭐 금의환향한 게 아니라고 어쨌든 직장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난 어영부영 살고 있어 출산 후에는 이명을 앓고 있어 왜 날 만나자고 했니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진득하게 솜사탕을 맛보자고 헉 남편 들으면 큰일 날 소리야 벌심하지 마 진중하게 살아가야지 LA로 이주하여 아이들을 잘 키울 거야 홍등의 곤충관에서 다른 암컷을 선택해 봐 안녕

 

가을 서리에 사라지는 *

암컷 반딧불이가 말한다

 

너는 참 지저분한 먼산바라기야 오랜 세월 일편단심이라니 남편은 폐암으로 돌아갔고 나는 LA에서 자식 두고 돌아왔어 시끌벅적한 실버타운에서도 외로움을 많이 타 너와 함께 살고 싶어 시간의 얼레 거꾸로 돌리면서 나를 안잠자기로 받아줄 수 없겠니 말년의 고독 너무 애애할 것 같아 나의 몸에서 청춘의 수액 더 이상 솟구치지 않지만 서로 추억을 쌓아가자 앞마당에 야채 심어 매일 푸짐한 시골 밥상 함께 나누고 싶어 내 제안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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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보(杜甫)의 시 「형화(蛍火)」에서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