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디드로의 '희극배우에 관한 역설'

필자 (匹子) 2025. 3. 21. 10:29

드니 디드로 (D. Diderot, 1713 - 1784)의 엣세이 「희극 배우에 관한 역설 (Paradoxe sur le comédien)」은 1770년에서 1780년 사이에 집필되었고, 1830년에야 비로소 파리에서 처음으로 유작으로 발표되었다. 대화 형식으로 집필된 이 작품은 “재능”에 관한 디드로의 마지막 열광적 구상을 집요하게 다루고 있는 에세이이다. 재능이란 디드로에 의하면 천부적으로 주어진 예술적 감성을 지적 능력을 통해 다스리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1769년에 발표된 「달랑베르와 디드로 사이의 대화 (Entretién entre d’Alembert et Diderot)」에서 제기한 바 있는] 재능에 관한 생리학적 유물론적 기초인 셈이다. 또한 역설에 관한 디드로의 글 「가릭의 책자 혹은 영국 배우에 관한 언급 (Observations sur une brochure intitulée Garrick ou les acteurs anglais)」은 1770년 야곱 그림 (J. Grimm)의 잡지 "문학적 서신 교환 (Correspondance littéraire)"에 이미 실린 바 있다.

 

 

디드로는 두 명의 가상적 대담자를 설정, 이들 간에 대화를 나누도록 한다. 그리하여 그는 마지막 단원에서 대화 형식으로 내용을 극적으로 개진한다. 그러니까 배우에 관한 역설의 주제는 서술 구조에 있어서 역설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첫 번째 대담자는 두 번째 대담자의 질문에 대해 답변한다. 질문하는 두 번째 대담자는 디드로가 1757년에 이미 피력한 바 있는 견해를 고수하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아들에 관한 담화 (Entretién sur le fils naturel)」에서 기술된 바 있다. 즉 위대한 배우는 아주 거대한 감정을 표현할 능력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배우란 비단 연극 공연에 출연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예술가 자신을 일컫고 있다.]

 

이에 비해 첫 번째 대담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위대한 배우 (예술가)가 되려는 자는 자신의 고유한 감정을 약화시키거나,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배제시켜야 한다.” 그러니까 배우/예술가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면, 그는 맡은 역을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한다는 게 첫 번째 대담자의 지론이다. 첫 번째 대담자는 동시대 배우/예술가들의 일화를 하나하나씩 열거하면서, 서술과 연극 공연에 합당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한다. 배우가 훌륭하게 기능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감정에 매몰되지 말고, 스스로를 극적 역할과 구분시킬 수 있는, 이른바 “자기 소외 (aliénation)”의 능력이다. 이를테면 냉철한 관찰력, 자신과 역할을 지적으로 구분시킬 수 있는 능력, 기술적 완전성 등이야 말로 재능 있는 배우가 처음부터 견지해야 할 사항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명제는 다음과 같은 역설을 불러일으킨다. 즉 오로지 아무런 특정한 성격을 지니지 않는 배우만이 모든 역을 맡을 수 있다는 역설 말이다. 다음의 사항을 가정해 보라. 만일 위대한 배우가 모든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낼 수 있다면, 그는 스스로 어떠한 특정한 성격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 어찌 특정한 성격 없이, 여러 가지 다른 인물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분명히 역설이다. 위대한 배우 내지 예술가는 스스로 무(無)의 존재이지만,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재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스스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다른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재현시키는 행위는 미메시스의 기능과 동일하다. 배우 내지 예술가는 생산적이고 무언가 형성시키는 힘을 지니며, 스스로 특수하지는 않으나, 모든 특수성을 표현할 수 있는 자라고 한다. 재능 있는 예술가는 첫 번째 대담자에 의하면 “끝없는 다양성”이다. 그러나 스스로는 결코 독창적일 수는 없다.

 

수많은 배우와 예술가들이 디드로의 글에 대해 연구하고 끊임없이 평문을 썼다. 그럼에도 아직 디드로의 글속에 담긴 예술 이론적 함의는 일목요연하게 지적되지 않고 있다. 1939년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실험극에 관하여 (Über experimentelles Theater)」라는 강연에서 디드로를 다시금 언급했다. 이로써 현대 극예술은 무대 위에서의 감정 이입 거부를 하나의 극예술 이론으로 채택하게 된다. 나아가 브레히트는 서사극에서 감정의 전달이 차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가령 관객에게서도 [배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