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7. 파르치발의 갈등 및 모순된 상황 (1)
아르투스 왕을 제외한다면 원탁의 기사들 가운데 파르치발이 가장 모순적이자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 이유는 그가 과거에 개인적으로 어떤 커다란 상처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파르치발이 과거에 얻게 되었던 커다란 심리적 상흔을 회피하려는 데에 있다. 물론 그는 성배가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파르치발에게 현재 중요한 난제들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파르치발이 과거에 입은 심리적 상처는 무엇인가? 구동독 작가 베르너 하이두첵 (W. Heiduczek)은 1974년에 동독에서 간행한 파르치발을 소재로 한 소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파르치발의 진정한 맹목성은 그가 자신의 고유한 무엇을 생각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다만 지식에 대한 믿음만을 고수하고 인간적 품위를 모방하려는 데에 있다. 무엇보다도 경솔한 복종심이 바로 그를 무정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역주: Werner Heiduczek: Die seltsamen Abenteuer des Parzival, Frankfurt a. M. 1989, S. 65.)
실제로 하이두첵의 파르치발은 사실에 대한 열정과 허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적과 동지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그는 오래 전에 용맹한 붉은 기사 이터 (Ither)와 피비린내 나게 싸운 적이 있다. 이때 이터의 칼에 의해 파르치발은 눈 한 개를 잃게 된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그는 결국 이터를 살해한다. 마치 오이디푸스가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아버지를 살해했듯이, 파르치발 역시 적과 동지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이터를 살해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터는 바로 파르치발의 친척이었다. 그러니까 붉은 기사 이터는 인권론자 내지는 반체제 인사로 상징화 된다.
문제는 이터와 아르투스와의 적대 관계에서 파르치발이 연루되어 교묘하게 이용당하는 데에 있다. 이터는 자기 땅을 돌려줄 것을 아르투스에게 강력하게 요구한 바 있었다. 그러나 아르투스는 이터의 땅을 돌려주지 않는 대신에, 카이에와 함께 몰래 이터를 제거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파르치발은 이터를 살해한 공로로 이터의 성에서 원탁의 기사로 임명된다.
하인의 극작품에서는 파르치발의 과거 행적이 그저 간략하게 암시되고 있을 뿐이다. 당면한 현실적 난 문제를 해결하고 백성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파르치발은 일단 어떤 새로운 구원의 사고를 추적해 나간다. 이때 모드레는 파르치발에게 다음과 같이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이터에 관해서, 붉은 기사의 죽음에 관해서 글을 쓰려고 하지 않지?” (26). 그러나 파르치발은 자신의 과거의 심리적 상처를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를 거론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동반한다. 더욱이 그것을 직시하고 백일하에 드러낸다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자신의 동료 속에 적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역주: 외부로부터 위협을 당하는 소수의 그룹은 항상 생존을 위해서 똘똘 뭉쳐야 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비록 그룹 속에 적이 도사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가정과 같은 혈연적 체제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가령 소련을 증오하던 오스트리아의 유미주의 작가, 카를 크라우스 Karl Kraus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때로는 가정과 같은 도당은 때때로 진리 (집단 이기주의 - 역주)의 뒷맛을 지니고 있다.” Siehe W. Emmerich: Die andere deutsche Literatur, Opladen 1994, S. 214.) 그렇기에 오늘날 친구에게서 전선 (戰線)을 분명히 구분하기란, 그리고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법이다. (역주: 이는 자라 키르쉬의 시 「나의 친구들에게, 오래된 동지들에게」에 나온 구절이다. S. Kirsch: Gespräch mit dem Saurier, Berlin/ DDR 1965, S. 67.)
8. 파르찌발의 갈등 및 모순된 상황 (2)
파르치발의 내적 갈등은 젊은 여인 쿠네바레와의 애정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재현된다. 다른 기사들의 경우와는 달리 그는 자의에 의해서 쿠네바르와의 사랑을 포기하려고 한다. 파르치발이 현격한 나이 차이를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다만 핑계일 뿐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자신의 부인인 블란셰플뢰어는 살고 있으며, 남편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는 이를 잘 의식하고 있다. (역주: 그러나 파르치발이 부인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쿠네바르와 헤어지려고 결심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블란셰플뢰어와 쿠네바르라는 두 여자에게서 제각기 장단점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입센의 페르 귄트의 주인공과 비교 분석될 수 있겠다.) 파르치발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대해서 예수테는 쿠네바르에게 다음과 같이 비아냥거리고 있다. “근본적으로 그는 여자를 경멸하는 인물이야” (32). 그러나 파르찌발은 여성을 경멸하는 자라기보다는, 과거에 이터 (혹은 부인 블란셰플뢰어?) 에게 저지른 죄에 대해 도의적으로 죄의식을 느끼는 피해자인 셈이다.
여성에 대한 우유부단한 파르치발의 태도는 성배에 대한 그의 입장과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에게는 사회적 이상과 개인적 행복을 한꺼번에 실현하는 게 중요하다. 허나 주어진 현실은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파르치발은 더 이상 가시적 물건으로서의 성배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가베인의 경우처럼- 오로지 개인적 행복에만 전념하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성배를 찾으려는 방향을 새롭게 규정하고, 동시에 개인적 삶의 가치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파르치발에게는 이중적인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예컨대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터의 죽음에 대한 규명이요, 부인 블란셰플뢰어와의 관계의 청산이다. 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파르치발은 영원히 방황할 수밖에 없다.
논의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이지만 파르치발이라는 인물은 -베르너 하이두첵이 의도한 바 있지만- 구동독의 체제 비판적인 작가들을 연상시킨다. 파르치발이 처한 모순적 상황은 사회적 자아를 강조하며, 이를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키던 70년대의 실제 작가들의 그것과 비교될 수 있다. 가령 아르투스가 사용하는 “어떤 꿈의 그림자”라는 표현은 70년대 동독 문학이 지향하던 바와 일맥상통하는 진보적 성향의 낭만주의적 자율성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밖에 파르치발이 처한 모순적 상황은 50년대 망명에서 돌아온 반파시즘 작가들의 상황과 비교될 수 있다. (역주: 크리스토프 하인도 호른의 최후에서 역사의 단절성과 연속성을 지적하면서, 이 문제를 거론한 바 있다 (K. Jachimczak: Gespräch mit Chr. Hein, a. a. O., S. 352f). 그러니까 히틀러의 집권 시기에는 실제로 반파시즘 저항 운동은 거의 없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그저 도망치며 생존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안나 제거스, 아르놀트 츠바이크, 빌리 브레델 등과 같은 작가는 어떤 가상적인 저항 운동을 갈구하고, 이를 문학 작품 속에 형상화했다. 말하자면 작중 현실은 -역사를 왜곡시킬 정도로- 실제 현실과 편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구동독이 쟁취된 게 아니라, 어부지리로, 그러니까 소련 군정으로부터 선사된 것이라는 점이다. 구동독은 건립 초기부터 반파시즘의 정신을 강조해야할 필연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1949년 이후 문화 연맹은 반파시즘 문학을 권장하며, 정부의 건립 정신을 정당화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망명 작가들의 반파시즘 저항 문학이 교묘하게 이용당하게 된다.) 파르치발의 투쟁이 아르투스 왕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듯이, 50년대 망명 작가들 역시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구동독의 정책에 공동보조를 취했던 것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45 동독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로박: (5) 무지한 자의 맹신으로서의 유토피아. 하인의 '원탁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0) | 2025.02.03 |
---|---|
서로박: (3) 무지한 자의 맹신으로서의 유토피아. 하인의 '원탁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0) | 2025.02.01 |
서로박: (2) 무지한 자의 맹신으로서의 유토피아. 하인의 '원탁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0) | 2025.01.31 |
서로박: (1) 무지한 자의 맹신으로서의 유토피아. 하인의 '원탁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0) | 2025.01.30 |
서로박: 폴커 브라운의 힌체와 쿤체 (0) | 2025.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