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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먹물뜨기와 위악 (僞惡)에 관하여

필자 (匹子) 2024. 12. 11. 10:49

 

지금까지 먹물뜨기, 즉 문신(文身)은 자신과의 약속 내지는 사랑의 징표로 활용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굳건한 맹약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 의미는 퇴색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신을 다시 지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신 제작은 간단하나, 문신을 제거하는 데에는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닙니디. 아래의 글 가운데 검은 색으로 표시된 것은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며, 푸른 색으로 필자의 말씀입니다. (신영복: 담론, 돌베개 265쪽 - 274쪽을 참고하라.)

 

교도소 재소자들의 문신은 자기가 험상궂고 성질 사나운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악(僞惡)입니다. 위선과는 정반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마지 작은 벌레가 큰 동물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울긋불긋하고 끔찍한 색을 드러내듯이,  문신을 지닌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험상궂은 몸을 드러냄으로써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합니다.

 

위악이 약자의 의상(衣裳)이라고 한다면, 위선은 강자의 의상입니다. 의상은 의상이되 위장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시위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있습니다. 단결과 전의(戰意)를 과시하는 약자들의 위악적 표현입니다. 강자들의 현장은 법정입니다. 검은 법의(法衣)와 엄숙성과 정숙성이 압도합니다. 시위 현장과 대조적입니다.

 

적과 흑, 부르디외의 상징 폭력violence symbolique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어째서 데모하는 노동자들의 폭력은 사악하게 보이고, 국가 지도자의 폭정은 선하게 보일까요?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강자의 위선과 약자의 위악이 위장이기 때문에, 다만 치장이기 때문에 우리는 근본적 의미를 간파하지 못하곤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위선이 미덕으로, 위악이 범죄로 재단되는 것입니다. 테러는 파괴와 살인이고, "전쟁은 평화와 정의의 논리다."라는 주장은 강자의 위선입니다. 테러가 약자의 전쟁이라면, 전쟁은 강자의 테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모순된 조어가 버젓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갑자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론De civitas Dei"에 등장하는 해적이 생각납니다. 그는 알렉산더 대제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했습니다. "폐하, 나는 범선 두 척으로 도둑질하기 때문에 해적이라 불리지만, 당신은 수십 척의 군함을 이끌고 도둑질하기 때문에 황제라고 불립니다."

 

약자의 위악은 잘 보이지만, 강자의 위선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감옥에서는 잘 보입니다. 감옥은 산(山)이기 때문입니다. (...) 북악산으로 신년 산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선 발 아래로 경복궁 창덕궁이 보입니다. 멀리 빌딩으로 가득 찬 서울 시가지가 보입니다. 그리고 빌딩마다 있을 임자들이 보입니다. 부자 권력입니다. 그러나 절반은 은행 대출입니다. 금융 자본의 권력입니다.

 

우리는 땅위에서 살아가지만, 땅 아래의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감옥은 형벌의 현장이면서, 사회의 축소 모델입니다. 춘하추동이 함께 뒤섞여 있습니다. 감옥은 물론 범법자들을 물리적으로 격리 구금하는 시설입니다. 그러나 미셸 푸코는 감옥을 다르게 정의합니다. "감옥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는 착각을 주기 위한 정치적 공간"입니다. 역설적 진리입니다.

 

수많은 검사들은 죄인을 감옥으로 보내는 일에 종사하지만, 정작 교도소가 어떠한 곳인지 잘 모릅니다. 그곳에는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 오골오골 모여있는 공간이지요. 벌금형, 공탁금 제도는 사라져야 합니다. 돈으로 죄를 사할 수는 없습니다. 교도소 역시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감옥이야 말로 삶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학교와 다름이 없습니다.

 

만약 굥석열이 이 사실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자신의 아내, 김건희를 빵에 보내지 않으려고 계엄령까지 발동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부디 그가 착각 속의 맹점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