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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건: (2) 최악의 투사

필자 (匹子) 2024. 9. 12. 11:06

(앞에서 계속됩니다.)

 

투사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일어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럴 경우 좀더 ‘순도 높은’ 투사가 일어납니다. 모르는 만큼 환상으로 채워지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연예인에 대한 태도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은 특정 연예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환상을 투사해서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듭니다. 그 이미지는 당연히 사람에 따라 무척 다릅니다. 그래서 같은 연예인을 두고 팬과 ‘안티’로 갈라져 설전을 벌이곤 합니다. 연예인 외에도 정치인, 운동선수 등 널리 알려진, 하지만 실제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순도 높은 투사의 대상이 됩니다.

 

투사는 사람을 대상으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정치집단, 직업군, 지역, 국가 등이 모두 투사의 대상이 됩니다. 특정 직업군을 이기적이고 돈만 밝히는 집단이라고 매도한다든지, 경상도와 전라도로 갈라져서 서로를 무조건 비방하는 현상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투사의 가장 좋지 않은 예는 ‘왕따’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희생양(Scapegoat) 만들기’입니다. 희생양 만들기는, 한 집단 내의 많은 사람이 특정한 한 사람에게 나쁜 환상을 투사해서 그 사람을 문젯거리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그 사람 탓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안 보이게 됩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따돌림당하는 사람의 정신적인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따돌림은 비교적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따돌림은 그보다 훨씬 교묘하게도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가족 중 한 명, 주로 아이 하나가 집안의 골칫거리가 됩니다. 식구들은 모두 그 아이만 없으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며 모든 것을 그 아이 탓으로 돌립니다. 어른들 사이의 갈등이 아이에게 투사되어 소위 문제아가 만들어지는 것은 흔한 현상입니다.

 

야비하게도, 저항할 수 없는 사람이 주로 희생양이 됩니다.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 사람에게 나쁜 환상을 투사해서 아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마음껏 공격을 퍼붓습니다. 그야말로 앞뒤 가릴 것 없는 공격성의 원시적인 배설입니다. 연예인 기사만 뜨면 악성 댓글을 ‘싸질러’ 놓은 것이 좋은 예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여러 정체성으로 살아갑니다. 나이, 성별, 가족관계, 국적, 직업, 취미. 그렇게 한 사람이 여러 정체성을 가집니다. 그중 무엇이 중요한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뉴욕에서 분석가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간 적이 있습니다. 일고여덟명의 정신분석가가 있었는데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들 유대인이나 정신분석가의 정체성이 훨씬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다만 9·11 이후 미국인이라는 것에 대한 의식이 조금 더 뚜렷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새삼 나는 늘 대한민국, 한국인 같은 단어를 염두에 두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9·11이 미국인의 정체성을 상기시킨 것처럼, 우리가 겪어온 외상은 항상 우리가 한국인임을 절감하게 했을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전쟁까지 겪으면서 우리로서는 대한민국과 한국인에 대해 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단일민족 개념을 강조한 역사교육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들로, 우리에게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무척 중요합니다.

 

희생양 만들기는 개인이나 집단 등 구체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근거도 없이 마구잡이로 한국인 타령을 들먹이는 것을 볼 때마다 저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좌절을 겪을 때마다, 자기애의 상처를 입을 때마다 사람은 남 탓을 하고 싶어지고, 희생양을 찾게 됩니다. 그 남이 꼭 사람일 필요가 없다면, 우리는 아주 가까이서 만만하고 익숙한 희생양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한국인’입니다.

 

축구에서 졌을 때 막무가내로 심판 탓만을 한다면 그것은 순수한 남 탓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종종 그런 거칠고 투박한 투사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성숙한 사람이라면 그런 식의 남 탓은 스스로에게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축구를 못하는 것은 심판 탓 같은 것으로는 가릴 수 없는 진실입니다. 결국 ‘우리는 왜 축구를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답은 명확합니다. 축구라는 종목의 저변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축구를 잘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애에 상처를 받은 우리 마음은 그런 이성적인 답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은 기어이 희생양을 찾아내서 좌절에 의한 분노를 뿜어내야만 합니다. 심판을 희생양으로 삼는 건 너무 속 들여다보이는 일이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럴 때 선택되는 것이 쉽고도 편리한 ‘한국인’입니다. 그렇게 한국인을 들먹이는 사람에게 ‘당신도 한국인 아니냐?’고 물으면, 그건 맞지만 축구를 망쳐놓은 ‘나쁜 한국인’과 자신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때 한국인 타령은 남 탓이 됩니다. 하지만 자신도 한국인인 이상, 한국인 타령은 스스로를 탓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한국인 타령은 남 탓과 자기비하의 두 가지 모습을 모두 가지게 됩니다.

 

개인이나 집단을 희생양 삼는 것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피해는 한국인 타령 쪽이 작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희생양 만들기처럼 한국인 타령도 생각을 중단시킨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한국인이어서’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거기가 막다른 길입니다.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진행되지 않습니다. 한국인 타령은 반성이 아닙니다. 반성하기 싫어서, 고민하기 싫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희생양 삼아 생각을 멈춰버리는 속임수입니다. 우리에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분노와 좌절, 그리고 가학적인 공격성을 다 받아내고 있는 쓰레기통 같은 것입니다.

 

칼럼을 마치면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국인 타령은 절대로 반성이 아닙니다. 좌절과 분노의 무분별한 배설일 뿐입니다. 배설해서 통증이 사라지면 그걸로 끝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배설이 아니라, 아픔을 견디면서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더라도, 왜 아픈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을성 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편리하고 달콤한 자기 비하가 아니라,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반성과 생각입니다. 우리, 한국인에 대한 진지하고 집요한 고찰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