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나오는 말씀
이미 언급했듯이, 벤야민은 예술 전반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정치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하나의 확고한 입장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가 모든 예술적 사상적 조류에 관여하지만, 어떤 한 가지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과거에 프란체스코 수사들이 취했던 행동, “모든 것을 지니지만, 어떠한 무엇도 소유하지 않는다. Omne habentes, nihil possidentes"라는 거리감의 자세와 연결됩니다. 프란체스코 수사들은 이러한 말로써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을 수정하여, 신에 대한 겸허함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Van de Meer: 34). 애착의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지만 끝내 그 대상과 결합하지 않으려는 특징은 에로스에 관한 플라톤의 사고에서도 나타납니다.
나아가 이러한 특징은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이 사회학적으로 천착한 사물의 교환 관계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각설, 벤야민은 당시에 회자하던 학문과 예술에 관한 혁신적 사항들에 접근해 나갔지만, 어떠한 이념 내지는 예술적 방향을 받아들여서 체화하지는 않았습니다. (Günther: 83.) 특히 정치적 이념의 경우 수수방관하는 제삼자의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이방인과 같은 자세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듯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첫째로 벤야민은 어떠한 외부적 폭력에도 핍박당하지 않으려는 유대인 특유의 소극적 신중함을 고수했으며, 둘째로 예술 작품 그리고 비평이라는 한 가지 영역에 집요하게 골몰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지적할 것은 벤야민에게 나타나는 원전 중심주의의 사고입니다. 벤야민의 글을 읽으면, 진리에 대한 플라톤의 재기억 이론이 떠오릅니다. 과거의 이데아를 다시 기억하고 재현하는 일 – 수많은 철학자는 그것이야말로 철학의 관건이라고 여기고, 과거의 진리, 독창성을 찾는 일에 골몰했습니다. 문제는 이로써 미래, 가능성, 자유의 나라 등을 스스로 찾는 철학적 과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기실 벤야민은 희망을 오로지 희망 없는 자들을 위해서 주어져 있“는 무엇이라고 간주하며 (Benjamin, GS 1/1: 201), 블로흐의 철학적 의향을 좌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벤야민을 이러한 문화적 비관주의로써 반-유토피아주의자로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의 관심사가 과거의 진리, 독창성, 원전 중심주의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자라면 하자일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술 작품의 독창성“은 벤야민에 의하면 ”과거에서 전해지는 전통과 부합되고 인지되는 무엇“에 불과합니다. 과거의 전통 내지는 원전(原典)을 중시하는 벤야민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그의 발언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번역은 벤야민에 의하면 원전에 충실한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 Georg Gadamer의, 이른바 수용자 중심의 해석학적 관점이 무시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벤야민은 오로지 인용만으로 구성된 글로써 가장 훌륭한 예술 평론을 완성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작업이 어쩌면 예술 작품의 본질을 구명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수단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벤야민은 이전에 나타난 예술 작품 그리고 이것을 생산한 예술가에 대해 과도한 관심을 기울였지만,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고유한 정치적 견해를 첨예하게 가꾸는 작업을 등한시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타자 내지는 명작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예술 애호가의 ”인지 행위aisthesis“를 낳는데, 이것이 결국 ”미학Ästhetik“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수동적 인지 행위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정치적 견해 및 세계관은 어쩔 수 없이 뒷전으로 물러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벤야민의 거리감 내지는 수수방관자의 처신은 파트릭 쥐스킨트Patrik Süsskind의 소설 『향수Das Parfum』의 주인공, 그르누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세상의 모든 여자의 향기를 다 맡을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의 고유한 몸의 냄새를 감지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를 빌어 다음과 같이 첨언하고 싶습니다. ”벤야민은 세계를 예술적으로 해석하는 데 골몰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과정에서 우리의 세계관을 더욱더 치열하게 벼리고 수정하는 노력이다.“
(7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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