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3. 억압의 사회학적 기능: 둘째로 라이히는 성의 억압이 비민주주의의 권위적 인간형을 양산한다는 가설을 내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성의 억압이 비민주주의의 인간형이 양산된다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비유가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권위적 가장과 그의 아내 그리고 자식으로 구성된 미국의 전형적인 가정을 상정해 봅시다. 그게 아니라면, 하인리히만 Heinrich Mann의 『신하』를 예로 들어봅시다. 주인공, 디데리히 헤슬링은 전형적 시민 가정에서 자란 젊은이입니다. 그는 어머니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지만, 자신의 사랑을 실천에 옮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임은 바로 자신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고찰할 때 아버지가 마치 신화 속의 용처럼 자신의 “연적 Nebenbuhler”으로서 아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경우와 동일합니다.
그렇기에 아들은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권위에 피학적으로 굴복해야 하지만, 내심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가학적 욕구에 사로잡힙니다. 아버지와 주인공 디데리히 사이의 이러한 갈등 관계는 주인공이 사회인이 되었을 때 그대로 재생산됩니다. 주인공은 권력자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하층민들을 업신여기고 학대합니다. 그의 심리는 소설 작품 내에서 폭군을 모시는 신하의 그것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신하는 독재를 자행하는 왕의 폭력 앞에서 아첨과 기회주의로 매번 위기를 모면하지만, 불현듯 그를 살해하고 싶은 충동적 욕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이렇듯 하인리히만은 한편으로는 권력 앞에서 꼬리를 내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자를 배반하고 그를 살인하고 싶은 무의식적 충동을 느끼는 소시민의 심리를 문학적으로 훌륭하게 형상화하였습니다. 라이히는 바로 이러한 현상을 사도마조히즘의 욕구로 규정하였습니다. 기실 우리의 주위에는 윗사람에게 허리를 굽히고, 아랫사람에게 불호령을 내리는 자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4. 결혼 전에 자연스러운 사랑의 삶의 실천은 어느 정도 가능한가? 이제 성적 욕구가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자명하게 밝혀졌습니다. 또한 가정의 체제 역시 주어진 사회의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을 공고히 하는 목적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라이히는 금욕을 당연시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가급적이면 유연하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방종으로 치달아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 될 것입니다. 라이히는 현대의 젊은이라면 자연스럽게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피력합니다. 그렇지만 라이히는 사랑을 돈으로 해결하는, 이른바 매춘 행위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처음부터 배격하였습니다. 우정에 돈이 개입되면, 그 우정은 반드시 깨어지기 십상이지요, 어쩌면 비판의 화살은 라이히의 주장대로 시민 사회에서 온존하고 있는 순결 이데올로기로 향해야 할지 모릅니다.
자고로 사랑하는 임을 위해서 정조를 지키려는 마음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임을 배신하면, 이는 임의 마음에 엄청난 상처를 가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임이 아직 없는데, 무작정 순결을 지킨다는 것은 과연 누구에 대한 배신일까요? 어쩌면 순결 지키기는 결혼을 미화하는 사회적 통념에서 나온 이데올로기일지 모릅니다. 이는 라이히의 억압 가설의 논거에도 전혀 일치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성윤리의 관점 대신에 생리학 내지 의학의 관점만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10대 젊은이들의 성행위는 적어도 의학적 차원에서는 문제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십대의 나이에 담배를 피우거나 폭음하면, 신체 발달과 건강에 치명적으로 작용하지만, 성행위는 -성병과 임신을 제외하면- 아무런 해악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판명된 바 있습니다. (Reich: 125f.)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논란거리로 부각될 것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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