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에서 *
박설호
산정에서 흘러나오는
살여울이고 싶다
“나의 물길은 숨 막힐 듯 퇴적층
절리 사이로 흘러왔지요.“
그렇지만 당신이 잠시
숭어 한 마리라면
넘실거리는 물낯 바라보며
함께 헤엄치겠지
호수를 끼고 있는
전나무 숲이고 싶다
“대서양의 눈물인 가랑비 맞으며
몸 털며 추위 견뎠지요.“
그렇지만 당신이 잠시
지빠귀라면
나의 등걸 위에서 함께
애창할 테지
오두막을 껴안은
작은 구릉이고 싶다
“극동의 비극에 쓰라린 미소 지으며
어두운 밤길 걸어 왔지요.“
그렇지만 그대가 잠시
아이비라면
부드러운 팔로 칭칭
내 몸 그러안겠지
바이에른 계곡 아래
오두막이고 싶다
“눈비 맞고 피해 다니던 이방인은
처마 아래 잠시 눈 붙였지요.“
그렇지만 당신이 잠시
화덕이라면
열기 앞에서 부지깽이 하나
보듬어주겠지
가랑비 뿌리는 4월의
구름이고 싶다
“그대와 만나기 전 나는 고향의
반골(反骨)이라 했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황혼의 빛이라면
창백한 내 뺨의 볕바른
열정 비춰주겠지
.................
* 프린: 알프스의 끝자락에 있는 독일 남부의 소도시. 그곳에는 두 개의 호도(湖島)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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