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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아이헨도르프의 '뒤란데 성'

필자 (匹子) 2024. 1. 20. 09:19

친애하는 J, 요젭 프라이헤어 폰 아이헨도르프 (Joseph Freiherr von Eichendorff, 1788 - 1857)의 소설 "뒤란데 성 (Das Schloss Dürande. Eine Novelle)"은 1837년에 발표되었습니다아이헨도르프의 어떠한 산문도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의미에서의 낭만주의의 특성으로 다루어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왜냐하면 아이헨도르프의 산문에 나타난 낭만주의적 요소는 -장편 소설이든중편이든 간에어떤 사회적 관련성 및 정치적 특성을 동시에 지니기 때문입니다.

 

가령 "뒤란데 성"에는 자유롭고도 무조건적인 사랑이 묘사되어 있습니다이는 봉건 사회 체제 내의 규범과 전적으로 대립되는 것입니다더욱이 등장인물들의 격렬한 사랑은 특히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물론 아이헨도르프는 자신의 작품 속에 담긴 사회적 정치적 내용을 한번도 명확하게 거론하지 않았습니다그렇지만 작가의 이러한 침묵은 지극히 의도적이지요우리는 등장인물들의 세계관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입장 등에서 작가의 은폐된 정치적 견해를 도출해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아이헨도르프가 살았던 성

 

친애하는 J, 이제 소설의 줄거리를 살펴보기로 합시다사냥꾼 레날드는 어느 여름날 밤에 집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습니다짐승을 사냥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어느 침입자를 잡으려고 합니다소문에 의하면 누군가 자신의 아름다운 여동생의 성을 탐한다는 것이었습니다가브리엘레는 참으로 아름다운 처녀였습니다가브리엘레는 원래 고아 출신이었으나어릴 적부터 레날드의 집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성장하였습니다레날드는 소리 없이 여동생의 방안으로 들어서는 남자의 멱살을 휘어잡습니다그런데 침입자는 다름이 아니라 히폴리트 폰 뒤란데 백작이 아닌가요젊은 백작은 레날드의 주인이었습니다그래서 레날드는 백작을 조용히 돌려보냅니다.

 

여동생은 사랑의 침입자가 누군지 알려고 하지만레날드는 이를 발설하지 않습니다대신에 여동생을 얼마 동안 근처의 수도원에서 머물도록 조처합니다왜냐하면 봉건 사회의 질서에 의하면 낮은 계급의 처녀는 한 가지만을 고수해야 합니다그것은 어느 누구에도 유혹당하지 않은 순결입니다다른 한편 봉건 영주는 통상적으로 처녀의 순결을 건드리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중세에는 결혼 첫날 밤 처녀는 단지 초야 권 (ius primae noctis)” 때문에 자신의 몸을 봉건 영주에게 바치기도 했지요처녀의 순결을 빼앗는 짓거리는 18세기에도 온존하고 있었습니다귀족들은 유혹당한 여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거나그미의 가족들에게 온갖 모욕을 가하곤 했습니다레날드는 여동생을 어딘가에 숨김으로써 행여나 자신과 가족에게 닥칠 불행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레날드는 오로지 위험으로부터 여동생을 지키려는 일념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그렇기에 여동생 가브리엘레와 뒤란데 백작 사이의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그러나 가브리엘레와 히폴리트 폰 뒤란데 백작 두 사람 사이에는 순수한 사랑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그것은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둔계급을 뛰어넘는 사랑이었습니다오빠의 조처로 인하여 가브리엘레는 수도원에서 고립됩니다사랑하는 연인의 결별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줍니다그미는 신분상의 이유를 생각하면서온갖 상념에 휩싸입니다사랑하는 그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자신과의 사랑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온갖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는 게 아닐까행여나 그가 다쳤으면 어떻게 하지결국 그미는 뒤란데 백작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게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한 번이라도 밤중에 깊은 숲 속을 방황하고 싶구나밤은 마치 꿈속처럼 광활하고적막하니까마치 멀리 떨어진 사랑하는 사람과 산 너머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야.” 어떤 자유로운 용기가 가브리엘레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비록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먼 곳에는 분명히 더 나은 삶이 전개되리라고 생각합니다어느 날 그미는 밤중에 뒤란데 백작을 몰래 찾아갑니다그러나 백작은 그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그미가 정원사 젊은이로 변장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히폴리트가 파리로 떠날 때 그미는 그를 동행합니다히폴리트는 가브리엘레가 행방불명되었다고 생각하고그미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해둘 뿐입니다그는 정원사 젊은이가 가브리엘레인 것을 끝내 알지 못합니다.

 

 

 

아이헨도르프의 초상화

 

 

그렇지만 파리 생활은 두 연인에게 달콤한 삶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파리에서의 삶은 오히려 끔찍한 재앙을 가져다줍니다파리에는 뒤란데 백작 소유의 집이 있었습니다가끔 히폴리트의 아버지나이든 뒤란데 백작 또한 이곳을 방문하곤 하였습니다어느 날 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가브리엘레도 끼여 있었습니다히폴리트는 잠시 외출 중이었습니다순간적인 실수 때문이었을까요가브리엘레가 쓰고 있던 가면이 하필이면 그 순간 땅에 떨어진 게 아니겠습니까순간적으로 사람들은 가브리엘레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립니다소문에 의하면 그미는 젊은 백작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이곳 파리로 왔다는 것입니다히폴리트의 아버지나이든 백작은 아들의 방종한 행동을 비웃으며가브리엘레를 천박한 매춘부로 간주합니다그럼에도 그는 아들에게 아무 말을 건네지 않습니다시간이 지나면 자식은 창녀 하나쯤 금방 잊어버리겠지하고 아버지는 생각합니다그러면서 그는 누구도 가면을 둘러싼 헤프닝에 관해서 히폴리트에게 알리지 않도록 명령합니다.

 

이러한 와중에서 레날드가 등장합니다그는 히폴리트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으라고 강요합니다여동생의 사랑과 성을 유린했으니이제 책임을 지라는 게 레날드의 요구였습니다그러나 히폴리트는 레날드가 어째서 그렇게 요구하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그는 그저 가브리엘레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달라고 막무가내로 떼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친애하는 J, 이러한 정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시겠지요며칠 후 히폴리트 폰 뒤란데 백작은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편지를 쓴 사람은 귀족 세력의 적대자이며혁명을 동조하는 익명의 인물이었습니다이때 히폴리트는 레날드를 의심합니다그리고는 그를 자신의 집에서 내쫓아버립니다레날드는 뒤란데 가문을 위하여성 ()에서 헌신적으로 일했고여동생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습니다그런데 자신의 노력이 과연 성공을 거두었는가요?

 

 

 

 

 

이제 레날드의 마음속에는 지배 계급에 대한 증오심이 서서히 싹틉니다레날드의 증오는 파리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파괴적 에너지를 잉태합니다. (이 대목에서 아이헨도르프는 사랑의 모티브를 시대에 합당하지 않은 질서의 문제와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레날드는 세력을 지닌 사람들을 찾아가서 조언을 구합니다그러나 앙시엥 레짐은 -뒤란데로 대변되는 귀족들 뿐 아니라부패하고 병든 왕 역시조언을 구하려는 평민 한 사람에게 조소만을 안겨줍니다자신의 여동생이 얼마나 히폴리트 폰 뒤란데 백작을 사랑하는지 레날드는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대신에 그의 답답한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귀족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혁명은 오로지 파괴 충동만을 집어삼킵니다몰락하는 지배 세력은 오래 전에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쉽사리 삭여질 줄 모르는 노여움만을 심어놓았던 것입니다레날드는 자신의 고유한 권한을 되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합니다그는 흩어진 혁명 대열을 다시 바로잡아뒤란데 성으로 향합니다이때 혁명군은 백작의 호위군과 마주칩니다양측 군대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돕니다히폴리트 뒤란데 백작 곁에는 정원사로 변장한 가브리엘레도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그미는 끝내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가브리엘레에게 중요한 것은 연인의 사랑을 쟁취하는 일이 아니라연인의 안녕이었습니다.

 

레날드는 히폴리트 폰 뒤란데 백작에게 한 가지 최후통첩을 전합니다약간의 말미를 줄 테니 히폴리트는 여동생 가브리엘레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것이 레날드의 요구 사항이었습니다그렇지 않을 경우 뒤란데 성은 온통 화염에 뒤덮일 것이라고 했습니다가브리엘레가 처해 있는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히폴리트는 이에 몹시 당황합니다가브리엘레를 만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그미의 자취를 찾을 길 없습니다가브리엘레는 양측의 대립을 무마시키려고 계획하다가끝내 기회를 잃어버립니다약정한 시간이 지나자히폴리트는 레날드의 혁명군을 공격합니다지금까지 한 번도 지니지 않았던 살인 욕구가 여지없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레날드는 두 남녀의 애정 관계를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히폴리트 역시 어째서 레날드가 그다지도 격렬하게 가브리엘레의 문제를 걸고넘어지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이러한 무지는 결국 두 사람의 삶을 파멸시킵니다레날드는 히폴리트를 겨누고 총을 쏩니다바로 이 순간 정원사로 변장한 가브리엘레는 히폴리트를 구하기 위해서 대신 총을 맞습니다죽음을 불사한 그미의 행위는 어쩌면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비롯했는지아니면 역사적 현실에 근거한 필연적 결과인지 모릅니다히폴리트는 그제야 비로소 죽어가는 그미의 얼굴을 바라보며자신의 목숨을 끊습니다레날드 역시 계급 갈등 그리고 죽음을 초월한 두 사람의 사랑을 그제야 뒤늦게 깨닫고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부질없었는가를 인식합니다그는 뒤란데 성을 폭파한 뒤 장렬하게 자결함으로써 생을 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