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잡글

박설호: 역도산, 사자, 핵무기

필자 (匹子) 2023. 12. 27. 04:47

1.

오늘날 어느 누구도 역도산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60년대만 하더라도 위대한 천하장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국내외의 수많은 레슬러들이 역도산의 당수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으니까요. 특히 위대한 레슬러, 김일 선생을 후계자로 가르친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독재 정권의 시퍼런 칼날 앞에서 일반 사람들은 역도산의 초인적 무술에 대해 경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민초들에게는 독재에 대항하고, 이를 조종하는 외세에 대적할 아무런 힘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은 그저 꿈을 꿉니다. 언젠가는 초인이 나타나, 세상의 부정을 깡그리 없어지게 하리라고 말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은 역도산을 떠올리고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곤 했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역도산이 어떻게 사망했는가 알고 계시는지요? 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것은 그래도 옷깃을 여미게 할지 모릅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죽음은 배반으로 인한 죽음입니다. 유다의 고발이 아니었더라면, 그리스도는 그렇게 일찍 그리고 그렇게 처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각설, 선생은 참으로 우연한 사건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의 어느 골목길에서 그는 깡패 한 명과 마주칩니다. 깡패의 손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어두운 골목길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깡패는 위대한 레슬러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하룻강아지 작은 몸집으로 거대한 범에게 덤비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도산은 가소로움을 느꼈습니다. 선생은 배를 내밀었습니다. 바가야로, 이놈아, 찌를 테면 찔러 봐.

 

3.

선생의 배에 칼이 꽂히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상대를 너무 얕본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는지 모릅니다. 역도산은 칼에 찔려서 골목에 쓰러집니다. 깡패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몇 시간 후에 행인은 칼에 찔린 선생을 발견하고 황급히 앰뷸런스를 부릅니다. 선생은 뒤늦게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역도산은 칼에 찔려서 사망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야밤에 근무하던 간호원은 정신을 잃은 거대한 몸집의 환자를 대합니다. 온갖 바늘로 그의 몸에 주사를 놓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의 몸은 온통 근육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 강인한 근육은 주사 바늘을 거부하는 법일까요? 결국 쇠 독이 온몸으로 퍼져 선생은 자신의 고귀한 목숨을 잃게 됩니다.

 

 

4.

또 한 가지 다른 예를 들어보기로 합시다. 로마의 아우렐리우스는 위대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집어삼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더욱이 자칭 위대한 스토아 학자라고 했지만, 자신이 남긴 참회록에는 이에 관해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장수들을 시켜서 보헤미아 지방의 마르코를 점령하려 했습니다. 로마 장수는 사나운 사자를 모아서 보헤미아 지방으로 향했습니다. 마르코 사람들은 평생 한번도 기이한 맹수, 사자를 목격한 적이 없었습니다. 사자들은 그저 “털 복숭이 개”로 착각되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P, 마르코 사람들은 용맹스러웠고, 힘이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혼신의 힘으로 “로마 산 털 복숭이” 개들과 싸웠습니다.

 

5.

그래, 이 세상에는 언젠가 사자와 싸우려는 미련스러운 인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자들은 마르코 사람들의 몸을 물어뜯어 죽였습니다. 만약 마르코 사람들이 사자에 대해서 잘 알고, 호랑이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사나운 맹수에 관한 정보를 미리 접했더라면, 직접 싸워, 몰락을 자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언젠가 미국의 국방부 부장관은 한국의 국방 위원회 소속 국회위원들을 모아놓고, 국방비 증액을 요구하였습니다. 한 나라의 일개 차관이 다른 나라의 국회위원들을 모아놓고 국방비를 운운하는 것은 내정 간섭에 대한 좋은 사례로 남을 것입니다. 나는 이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다음의 사항만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즉 부장관의 발언이 미국 제 2사단의 한강이남 배치와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는 게 바로 그 사항입니다.

 

6.

미군 제 2사단의 한강이남 배치는 다목적의 의도를 지닌다고 합니다. 첫째로 서울 한복판의 땅을 돌려줌으로써 남한에 온존하고 있는 미군으로 인한 여러 가지 부작용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로써 미군들은 “서울에 황금 땅을 차지하고 있다”라는 비난을 무마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교통난을 해소해 줌으로써 장갑차 사건 이후로 촉발된 반미 감정을 약간 무마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둘째로 미군이 후방에 배치되면 특히 수도권 지역에 사는 남한 사람들은 전쟁의 불안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휴전선 지역의 남한 군대는 자체의 방위를 위하여 미국의 첨단 무기를 구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 사항입니다. 실제로 미군의 주둔 장소는 그다지 문제되지 않습니다. 현대의 전쟁은 이라크에서도 증명되었듯이 과거의 재래식 전쟁과는 달리 정보 전쟁입니다. 따라서 위험 지역은 우선적으로 DMZ가 아니라, 양측 군사 전략적 요충지일 것일 것입니다. 참으로 가관인 것은 남한의 보수 언론이 미국의 강경 정책에 아양을 떨고, 전쟁 불안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7.

진리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자고로 “무기가 있는 곳에, 살육이 있습니다. (Ubi arma, ibi caedes)” 총기 소유가 허용되는 미국에서는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합니다. 총기 소유가 금지된 남한에서는 엽총 사고가 발생하곤 하지만, 총기 난사 사건이 빈번하지는 않습니다. 남한의 곳곳에 핵무기가 많이 있을수록, 한반도가 더욱더 안전하게 될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역도산이 강인한 근육으로 무장해 있지 않았더라면, 자그마한 단검을 두려워했더라면, 그는 결코 개죽음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마르코 사람들이 사자의 용맹성을 익히 알고 있었더라면, 그렇게 처절할 정도로 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핵무기 시대에 우리가 정작 필요로 하는 것은 “두려움을 느낄 줄 아는 용기”이입니다. 정말로 우리는 핵탄두에 대해서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껍데기는 가라. 이 세상의 모든 쇠붙이는 사라져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당장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무기 없는 세상을 서서히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남한의 정치가가 추구해야 할 평화 정책이며, 평화를 위한 수단이자 목표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