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잡글

박설호: (2) 미국 문명 비판과 흙의 권리

필자 (匹子) 2023. 12. 8. 10:04

(앞에서 계속됩니다.)

 

8.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에 대한 폭력을 아름답게 수식한 비인간적인 용어와 다름이 없습니다. 신화학자, 카를 케레니는 휴머니즘이 바로 18, 19세기의 유럽에서 기본적인 교육 강령으로 채택되어, 종국에는 파시즘을 잉태시켰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부를 축적하라!Bereichert euch!”는 요구 사항은 루터와 칼뱅의 계명으로서 오로지 “부지런함, 금욕, 훈련”만을 강조하였습니다.

 

남성적 수직적인 요소론은 르네상스 이후에 인간을 자연의 우위에 설정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권력 그리고 금력의 확장을 통해서 지상의 행복이 이룩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를 고려할 때 서구인의 사고에는 언제나 부정적 의미로서의 “물신 숭배의 사고”가 잠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금을 숭배하는 사고는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더 많이” 등과 같은 올림픽 구호와 함께 극에 달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피타고라스가 염두에 두었던 수의 질적 요소, 영혼을 간직한 자연의 여성성 그리고 이성의 일부에 해당하는 감성 등은 철저히 외면당하게 되었습니다.

 

9.

서구의 자연과학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자연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현세의 삶은 베이컨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물리 역학의 도움으로 풍요롭게 변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물리 역학은 여성으로 상징화되는 유기체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백인 남성의 기계적 조립 작업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캐럴린 머천트는 『자연의 죽음The Death of Nature』 (1983)에서 근대 과학이 “자연과 여성에 대한 전쟁”이었음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즉 베이컨의 현세의 행복을 위한 자연과학 연구는 머천트에 의하면 오로지 물리 역학의 죽은 지식을 활용할 뿐, 철저히 여성적 특징을 배제해 왔습니다.

 

가령 마법, 마력, 몽상 그리고 예언 등의 특징은 자연의 연구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프랜시스 베이컨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연법칙을 구명할 때 마녀사냥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과학 기술은 자연의 비밀스러운 구멍을 더욱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기계적 장치로 마녀를 고문하듯이, 자연을 노예처럼 괴롭혀야 한다고 설파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기 전에는 사람의 기질이 잘 드러나지 않듯이, 자연은 붙잡아서 단단히 묶기 전까지는 프로메테우스처럼 계속 형상을 바꾼다. 자연은 인위적인 도구 (기계 장치)로 시험하고 괴롭혀야 스스로를 잘 드러낸다.” (Carolyn Merchant: The Death of Nature: Woman, Ecology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 San Francisco, 1983, P. 169)

 

10.

베이컨에 의하면 기술은 자연과 여성을 정복하는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이러한 기술은 기계론을 강조하는 죽은 지식이었습니다. (조영준: 근대의 인간 중심주의, 실린 곳: 미래를 위한 환경 철학, 연암서가 2023, 102쪽.) 그러나 여성들이 선택한 기술은 영혼을 다루는 심리치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성들은 에서 생명을 찾았고, 약초에서 치유의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베이컨과 같은 백인 남성들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서 마녀에 대한 고문 기술을 자연 탐구에 활용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 백인 남성들은 모든 것을 카테고리로 차단하고, 여성을 마치 물건처럼 소유하기 위해서 여성의 자유를 구속하였습니다. 권력자는 다른 사람들의 비판의식을 마비시키는 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통행금지제도를 만들어 인간의 시간을 구속하고, 감옥과 철조망으로 인간의 장소를 제한했습니다. 모든 법적 행정적 조처는 남성적 수직적 요소론의 연장으로 실행되었습니다.

 

11.

마르크스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한 사상입니다. 왜냐면 제삼세계에는 가난하고 핍박당하는 노동자들이 즐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생태주의의 시각으로 고찰하자면, 마르크스의 사상 역시 요소론적 진보라는 커다란 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마르크스주의가 진보 사상의 한 형태인 “인본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서양인들의 자연 정복을 도모하는 사고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고찰할 때 마르크스주의는 제대로 실천되지 못했습니다. 20세기에 이르러서도 “자연의 인간화”만 중시되었으며, “인간의 자연화”는 거의 무시되었습니다. 어쩌면 계급 없는 사회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관계만을 향상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고 마르크스는 판단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하락된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오늘날 자연 파괴라는 안타까운 현상은 무조건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려는 인간 편의주의가 낳은 필연적 결과입니다.

 

12.

오늘날 세계는 커다란 문제점들을 안고 있습니다. 핵전쟁, 생태계의 파괴, 인구 폭발, 에너지 자원의 고갈 등을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서양의 학문적 방법론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남성적 시각 그리고 요소론에 입각한 인위적(人為的)이자 인위적(人偽的)인 의향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사물을 분해될 수 있지만, 원 상태로 환원하지 못하는 과학 기술의 맹점을 생각해 보세요. 현재 우리는 원자재를 남용할 수는 있지만, 쓰레기를 원자재로 되돌려놓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구멍 난 오존층을 메울 수 있을까요? 21세기 중엽에 이르면 한반도는 어느 정도 물에 잠기게 될까? 어느 누구도 이를 예단하지 못합니다.

 

언젠가 앙드레 글뤽스망André Glucksmann은 다음과 같이 일갈했습니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려던 파우스트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종국에 이르러 자신의 묘혈을 파게 했습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사회 개혁을 위한 창의적인 노동은 더 나은 고향을 창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부자유의 철창 속에 갇히게 했습니다.

 

13

일단 프로메테우스의 예를 들어봅시다. “프로메테우스(Pro + Metheus: 미리 바라보는 자라는 뜻)”는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건네줍니다. 이로써 반신은 제우스로부터 끔찍한 벌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용감하고 희생적 행위를 내내 칭송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에게 건네준 프로메테우스의 선물은 자비심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면서, 원래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하나의 능력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것은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예견 능력을 그대로 지닌다면, 파괴되고야 말 자연을 예견하게 될 테고, 그렇다면 불을 섣불리 받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은 독일의 시인 귄터 쿠네르트Günter Kunert였습니다.) 모든 생명체에 대한 인간 자신의 우월감 그리고 정복욕에 바탕을 둔 공격 성향 등은 인간 스스로 반성하지 못하게 작용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