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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폰타네의 '에피 브리스트'

필자 (匹子) 2023. 12. 5. 11:38

 

친애하는 J, 오늘은 테오도르 폰타네 (Th. Fontane, 1819 - 1898)의 『에피 브리스트』에 관하여 언급할까 합니다. 작가는 1890년에 소설 집필을 착수하여, 1894년 그리고 1895년에 완성하였습니다. 작품은 80년대 프로이센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하여, 결혼의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1886년 프로이센 장교, 아르만트 폰 아르데네 (A. v. Ardenne)는 뒤셀도르프의 판사, 에밀 하르트비히와 백주 대낮에 결투를 벌였습니다. 왜냐하면 에밀은 자신의 아내, 엘리자베트 폰 플로토 (E. v. Polotho)와 비밀리에 정을 통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작가들은 이것을 소재로 소설을 집필한 바 있습니다. 가령 카를 로베르트 레싱 Carl R. Lessing은 "에피, 이리 와ㅋ"를 썼고, 프리드리히 슈필하겐 Fr. Spielhagen은 ?시간 때우기 위해서? (1896)를 발표한 바 있는데, 폰타네는 이 두 작품을 창작에 원용하였습니다. 두 작품은 세인의 뇌리에서 망각되었고, 그저 폰타네의 작품만이 문학사에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결투의 심리학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럽의 시민 사회에서 결투를 벌인 사람들은 주로 귀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소한 문제에도 상처입지 않으려 했고, 걸핏하면 장갑을 상대방에게 던지곤 하였습니다. 특히 여자 앞에서 자존심 상하는 것을 남자들은 못내 싫어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여자가 다른 남자와 만나서 통정하게 되면, 이는 결투의 필연적 요건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귀족들은 결투를 통해서 얼굴에 상처 입는 것을 하나의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얼굴의 칼자국을 “Mensur” 혹은 “Kaiserschmiss”라고 명명하기도 하였지요. 문제는 결투를 통해서 상대방이 목숨을 잃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도 프로이센 제국의 법은 결투 행위에 대해 관대했습니다. 결투를 통해서 상대방을 죽인 자는 기껏해야 몇 달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곤 했으니까요. 결투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폐지되었습니다.

 

이제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남자주인공 인슈테텐은 호엔-크레멘 지역의 귀족입니다. 그는 브리스트 기사 협의회의 집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여자 친구인 브리스트 부인의 딸에게 청혼합니다. 인슈테텐은 힌터 폼메른의 케신 지역의 고위 관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인슈테텐의 직장은 안정된 것이었고, 출세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좋은 성품과 선한 도덕”을 지닌 남자가 행하는 직업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면 국가의 녹을 먹는 군수 내지 현감이라고나 할까요? 17세의 어린 소녀 에피는 자신보다 20년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합니다. 말하자면 에피의 부모가 무언가를 잘못 판단하여, 어린 소녀를 37세의 나이든 노총각과 결혼시킨 것입니다. 에피에게는 결혼에 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미는 예식에 길들여 있었습니다. 신랑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지만, 그에 대해 어떤 사랑의 감정도 솟구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두 사람이 서로 죽도록 사랑한다면, 20세라는 나이 차이가 뭐 그리 문제일까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나이 차이가 아니라, 여주인공이 사랑과 결혼에 대해 아무런 준비 없이, 부모가 시키는 대로 결혼식을 부랴부랴 올렸다는 데 있습니다. 에피는 새로운 환경에 대해 처음에는 놀라워합니다. 무료한 시간을 혼자 보내야 했습니다. 케신은 호엔-크레멘에 비해 아담했으나, 하루 종일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는 작은 지역이었습니다. 결혼 생활의 지루함은 17세의 신부를 서서히 고통 속으로 몰아갑니다. 인슈테텐 역시 예절 바른 남자였으나, 사랑스러운 애인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서로 구애하고 상대방을 자극하기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너무 어색했습니다. “인슈테텐은 착하고 사랑스럽게 행동했으나, 그미의 애인은 아니었다.” 여주인공은 불과 17세의 소녀였습니다. 혼자 있으면, 기이한 유령의 소리 그리고 유령의 상을 대하고 소스라치게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어린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며, 직장 일에만 몰두할 뿐입니다. 나중에 두 사람 사이에서 딸이 태어납니다. 출산 뒤에야 비로소 에피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이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미는 내적인 고독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우연히 에피는 크람파스라는 남자를 알게 됩니다. 크람파스는 케신 지역의 관리로서 여성을 다루는 솜씨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크람파스는 이른바 “바람꾼”이었는데, 결국 여주인공을 꼬드겨서 그미와 살을 섞게 됩니다. 문제는 여주인공이 크람파스에 대해 전혀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에피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묘하게 크람파스와 얽히게 됩니다. 크람파스는 기회 있을 때마다, 두 사람의 밀회가 밝혀지면, 끔찍한 결과가 일을 것이라고 여주인공에게 협박 아닌 협박의 말을 던집니다. 에피는 비밀리에 남자를 만나서 통정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이러한 짓거리 자체를 몹시 싫어하게 됩니다. 어느 날 인슈테텐이 베를린으로 전근되었습니다. 에피는 이를 몹시 기뻐합니다. 더 이상 크람파스를 만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피와 인슈테텐은 유유자적하게 베를린에서 지내며, 조화로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로부터 약 7년 후에 인슈테텐은 우연히 편지를 정리하다가 서류함에서 편지 묶음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들은 크람파스가 오래 전에 에피에게 보낸 편지들이었습니다. 인슈테텐은 자신의 자존심이 심각하게 상처 입게 되었다고 느낍니다. 증오심 내지 질투심이 그의 마음속에 솟구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크람파스와의 결투만이 자신의 명예를 찾을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판단합니다. 결투 끝에 크람파스는 사망하게 됩니다. 문제는 결투만으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인슈테텐은 모든 게 자신의 상상에서 비롯한 것이며, 우스꽝스럽다고 여깁니다. 명예라는 개념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슈테텐은 사회의 계명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9세기 말 경의 시민주의의 생활방식은 20세기의 한국 사회와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강제적 성윤리가 맹위를 떨치는 가부장주의 사회라는 게 공통적이지요. 인슈테텐은 에피와 이혼합니다. 그것은 말이 이혼일 뿐, 아내를 집밖으로 쫓아내는 행동이었습니다. 에피의 부모는 자싱의 행복보다는 사회적 이목을 더욱 중시합니다. 그들은 이혼한 딸년을 반갑게 맞지 않고, 베를린으로 돌려보냅니다. 그후 에피는 베를린의 초라한 방을 구해서 하녀와 함께 살아갑니다. 그미의 딸이 10세 되었을 때, 여주인공은 딸을 이혼 후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딸 아니는 친엄마를 무척 낯설게 여깁니다. 그래도 자신의 아버지, 인슈테텐에게 정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 에피는 극도의 고통을 감내하지 못합니다. 몸이 허약하게 된 에피는 딸이 다시 왔을 때 졸도합니다. 에피는 이제 건강을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해졌습니다. 부모는 죽음 직전에야 비로소 에피를 집으로 불러들여, 딸과 화해합니다.

 

에피는 남편을 전혀 원망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죽습니다. “그는 모든 경우 정당하게 행동했어요.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는 많은 선량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사랑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고결한 태도 말이에요.” 소설을 끝까지 읽으면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깨닫게 됩니다. 『에피 브리스트』는 가장 불행한 영혼의 삶을 기술한 작품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주인공들은 사랑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만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 비하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다지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남녀는 나쁜 환경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인슈테텐은 질투심과 명예욕 때문에 자신의 아내를 파국으로 몰아갑니다. 그에게는 모든 도덕, 관습 그리고 법 등을 떨칠 수 있는 배포가 없으며,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인 사랑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요? 가령 에피는 고립된 삶 속에서 엄청난 외로움을 느꼈으므로, 심리적 안식처를 필요로 했습니다. 굳이 크람파스의 품이 아니라도 좋았습니다. 그런데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주인공은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는데, 이는 간통으로 이어지고 나중에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폰타네의 작품은 19세기의 다른 간통소설들과 비교할 때 매우 황량하고 암울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사랑의 부재 (不在) 때문일 것입니다. 『보바리 부인』의 여주인공, 엠마는 북프랑스의 답답한 시골 그리고 점액질의 남편의 품을 벗어날 때 해방감을 느낍니다. 그미는 몇몇 남자와 통정할 때, 일시적이나마 사랑의 감정을 느낍니다. 채털리 부인은 산지기 멜히오르와 만나, 성불구인 남편에게서 찾을 수 없는 커다란 오르가슴에 깊이 빠져듭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자신의 사랑을 위하여 주위의 온갖 비난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애인인 브론스키와 재혼하려고 끝까지 발버둥 칩니다. 이러한 여주인공들은 일시적으로, 혹은 오랫동안 사랑을 느끼고, 이를 더욱더 오래 간직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들에 비하면 『에피 브리스트』의 여주인공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랑으로 인한 행복감도, 순간적 황홀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