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토닌 아르토 (A. Artaud, 1896 - 1948)의 "연극과 그의 이중성 (Le Théâtre et son Double)"은 1938년 파리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아르토의 논문 모음집은 20세기 연극 이론서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해된다.
지금까지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극장의 무대를 시민 계급의 입장을 옹호하는 공간이라고 간주했으며, 이와 관련하여 아르토의 연극에 대한 일련의 노력을 부정하였다. 그럼에도 "연극과 그의 이중성"은 무정부주의적 급진성, 무의식적 꿈에서 일탈한 파괴적인 상 등에 대한 은밀한 욕망을 표출시키고 있다. 물론 아르토는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개인주의적 폭력을 얄팍한 스노비즘이라고 비난하였고, 이를 아주 진지하게 (만인을 위한 장르의 원칙으로서) 투영시켰다. 그럼에도 아르토의 이러한 노력은 특히 프랑스에서 주어진 현실과는 무관하거나, 기껏해야 고전적 실험성에 침잠한 겁 많은 태도로 치부 당했다.
아르토는 특히 아시아의 연극 모델을 자유롭게 수용하여 [발리 섬 (島)의 연극은 서구의 심리적 윤리적 극작품의 전통과는 조금도 관계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번도 듣지 못한 독창적인 연극을 창조한다. 가령 아르토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언젠가 인간 삶의 파국을 경고하기 위해서 원용한 바 있는) 페스트의 상을 놀랍게 기술한다. 실제로 페스트 환자는 끔찍하고도 새로운 존재론적 한계 상황에 처한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인습과 사회적 연결 고리로부터 일탈된다. 그의 운명은 죽음 아니면 극한적 순화 (純化)라는 양자택일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자아는 해방되기 위하여 전염병에 의한 히스테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자아는 지금까지의 모든 조심성과 분별력을 상실하고, 자연의 검은 마술에 스스로를 맡기게 된다. 따라서 “끔찍함의 연극 (théâtre de la cruauté)”의 등장인물들은 삶의 극한적 위기로 요약되는 위험 속에서 (마치 비밀스러운 상형 문자처럼) 극단적으로 행동한다. 이러한 예술 형태의 철학적 차원은 삶의 극한적 위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 “끔찍함의 연극”은 피비린내 나는 행동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마치 쇼펜하우어의 의미에서 삶이 끔찍한 것처럼) 그것은 -창조주와 관객에게 끔찍함을 안겨주는 한- 빛나는, 힘든 그리고 일관적인 작업의 소산이다. 끔찍함의 연극은 연극 참여자의 예민한 정서와 거대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아르토에 의하면 귀신 쫒는 의식과 같은 (우주 속에서 인간의 존재를 의심하는) 그러한 연극만이 하나의 전체적인, 환각적인 두려움 혹은 하나의 전체적인 웃음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연극은 -아르토에게는- 미메시스가 아니라, “암시 (Suggestion)”, “구체성” 그리고 “공간 속의 움직임”이다. 그의 표현 수단은 춤, 음악, 광속 (光束), 팬터마임, 미믹, 제스처, 억양, 고함, 거대 인형, 마스크, 의상 등 모든 대상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니까 글로 기술된 대본을 그대로 모방할 게 아니라, 주제상의 가능성을 장면 속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아르토는 대본 대신에 연출 행위를 강조한다. 왜냐하면 극작품속의 대화는 -아르토에 의하면- 이미 심리극과 함께 깡그리 파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르토는 연극을 궁극적으로 “자연 (ϕύσις)”, “어떤 사라진 기초적 지식”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부조리 연극 혹은 “(TV 혹은 영화에 반대하는) 무대 연극 (Living Theater)”, 내지는 “옥외 연극 (théâtre du Soleil)” 등의 공연에서 새롭게 수행되곤 하였다.
아르토는 유희의 유연한 오락 가치 혹은 무언가를 치유하며 누군가를 교육시키기 위한 윤리적 공간으로서의 연극을 문제로 삼지 않는다. 문제는 마법적이고 형이상학적 연극으로서, [감각적으로 인지될 수 있는 기호학에 의해, 그리고 복잡한 (관객의 심리를 꿰뚫는 유희 공간의 알파벳에 의해] 어떤 발설되지 못한 무엇을 참신하게 지적하는 일이다. 아르토에 의하면 진정한 연극이란 무언가를 분석하거나 기술하는 예술이 아니라, (끔찍함을 야기하는) 주문 (呪文)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아르토의 연금술적 연극은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적 금 (金)을 심령학적으로 추출해내는 작업이다.
현대 극작가들은 무대 장치의 가능성, 실험적 공간 등의 확장을 위하여 아르토의 연극을 과감히 도입하였다. 아르토의 연극은 “객관적이고 생생한 마력”으로서, “제식”으로서 사용될 뿐 아니라, 몇몇 지식인들의 “발언 창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하이너 뮐러와 같은 현대 극작가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만약 아르토의 연극이 대중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면, 인간과 자연을 화해시키는 매개체로 발전될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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