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섭의 "눈길"
어둡고 낯선 길을 언 발로 쏘다니는
세상 모든 아들들은 지명 수배자였거니.
어머니,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지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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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들판을 걸어가는 일은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난의 행적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들들”은 “어둡고 낯선 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그들의 발은 꽁꽁 얼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임연당 이양연의 시를 떠올리게 됩니다.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이 시는 김구 선생님의 인용으로 널리 알려진 한시입니다. 겨레와 조국을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후세 사람들에게 자신의 흔적이 하나의 이정표가 되기를 바라는 희생정신이 깃들어 있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박기섭 시인은 이러한 방랑을 하나의 범법행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둡고 낯선 길"을 터벅터벅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시인의 눈에는 “지명 수배자”와 같습니다. “아들들”은 굳이 남자라고 칭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어머니, 자연의 눈에 아들로 비칠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죄를 저질렀을까요?
누가 목숨을 부지하려고 식물을 뜯어 먹는가요? 누가 마구잡이로 사냥하여 동물들을 구워 먹는지요? 집을 지으려고 온갖 나무를 베어 자연을 훼손하는 자들은 누구인가요? 누가 수많은 동식물을 멸종시키게 하는가요? 나뭇가지를 난방용 땔감으로 사용하고, 땅을 헤집어서 석탄과 석유를 채굴하는 자는 누구인가요? 이로 인해 온실 효과가 발생하여 해수면은 높아지고 있습니다. 두발짐승은 폭우와 가뭄, 태풍과 온난화 현상에 대응하기는커녕 지금도 동족을 살해하고 어린아이들을 죽이는 일을 비일비재하게 저지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악마가 아니라, 천사에 가깝다고 우깁니다. 인간이 “언 발로 쏘다니는” 노력, 다시 말해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마저 다른 생명체의 관점에서는 끔찍하고 추악하며, 잔인하고 처절한 범행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게 어쩌면 진정한 생태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요? 어머님은 마치 인간의 행위가 작은 잘못이라는 듯이 자식의 잘못을 덮으려고 합니다. 눈이 내려 범죄자의 발자국이 지워지고 있습니다. 박기섭 시인의 작품 “눈길”은 우리의 존재를 스스로 돌아보게 합니다. 작품은 우리에게 용서하는 마음으로써 우리의 실수와 잘못 그리고 심지어는 범행마저도 덮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자연의 마음가짐은 인간의 시각으로는 좀처럼 간파할 수 없는 보살핌이며 자애로움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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