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20후독문헌

서로박: 학문의 따로 국밥, 혹은 다니엘 켈만의 '세계를 재다'

필자 (匹子) 2023. 7. 28. 10:50

자연의 역사 연구는 그야말로 자연과학 전반에 걸친 지식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과업입니다. 식물학, 동물학, 광물학은 물론이고, 낯선 지역의 기후와 지질을 알아야 하며, 고고인류학과 민속학 고생물학 분야까지 탐색해야 가능한 학제적 연구 분야입니다. 그런데 알렉산더 폰 훔볼트(1769 – 1859)는 이 모든 것을 하나씩 체계적으로 섭렵해나갔습니다. 그는 1799년 6월 5일에 에스파냐에서 자신의 친구이자 평생의 동료 에메 봉플랑Aimé Bonpland과 함께 신대륙으로 떠납니다.

 

40일 동안의 항해 끝에 두 사람은 쿠마나 항구에 도착합니다. 그후 중부와 남부 아메리카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지도를 작성하고, 광물과 동식물, 원주민의 삶 그리고 그들의 풍습을 탐구합니다. 모든 새로운 사물은 직접 보고 익히는 게 참다운 지식이라고 여깁니다. 여행을 마친 그들은 워싱턴에서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을 만난 다음에 1804년 8월에 프랑스의 보르도로 돌아옵니다. 탐험은 거의 5년 동안 지속된 셈입니다. 처음에 훔볼트는 베를린에 잠시 머물다가 파리로 돌아가서 약 22년 동안 그곳에서 저술 작업에 몰두합니다. 1829년에는 시베리아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지나간 세계를 기술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독일 작가, 다니엘 켈만 (1975 - )은 자신의 소설 속에 18세기 말의 장면을 멋지게 담았습니다. 『세계를 재다Vermessung der Welt』 (2005) - 이것은 “세계의 측량”이라고 번역되는데, 역사 소설에 속합니다. 이 책은 박계수씨의 번역으로 2019년 민음사에서 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사건이 소설로 형상화된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역사를 생생하게 대하려는 독자는 이 소설에서 별반 얻을 게 없습니다. 왜냐면 소설은 가상의 문학적 현실을 서술하기 때문입니다.

 

 

훔볼트는 1828년에 자연과학자와 의사 협회 주최의 17번째 모임에 괴팅겐에서 살던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 (1777 - 1855)를 초대합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베를린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가우스는 책상에 앉아서 평생 연구에 골몰했고, 훔볼트는 평생 자신의 자연사 연구의 소재를 신대륙 등 세계에서 직접 탐험했습니다. 한 사람은 머릿속에서 암호를 풀어헤치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높은 산, 동굴 등을 뒤지며, 새로운 사물들을 접하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육십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가우스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몹시 영리하다고 믿고,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김나지움에 보냅니다. 불과 20세의 나이에 가우스는 책 『대수학 연구Disquisituones Arithmetica』라는 놀라운 책을 탈고합니다. 하나 그에게는 자신의 책을 발간할 돈이 없습니다.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놀리고 돈벌이를 위해서 틈틈이 측량 기사로 일합니다. 나중에 그는 천문학과 물리학을 전공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방정식 이론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1828년에 베를린 근처에 있는 산정에서 가우스를 만납니다. 훔볼트는 오래전에 신대륙을 탐색하였고,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에 관련된 수많은 책을 집필한 바 있습니다. 그는 사람 만나기를 즐기고, 새로운 무엇을 찾기 위해서 다른 나라로 향하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가우스는 그와는 정반대의 인물입니다. 가우스는 사람들 만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게다가 멀리 떠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우스의 성격은 매우 변덕스럽지만, 은밀히 여자들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우스가 여자들을 만나서 로맨틱한 사랑을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홍등가에서 만나 성 도락을 즐길 뿐입니다. 이는 훔볼트와는 다른 생활습관입니다.

 

그런데 훔볼트와 가우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측량하는 일입니다. 가우스는 자신이 100년 뒤늦게 태어났더라면, 수학자로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며 살 텐데 하고 푸념을 터뜨립니다. 그는 수학의 난해한 공식들을 학문 연구를 통해서 증명해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과거의 지식을 바탕으로 이론을 설정하지만, 우리는 결국 미래 사람들에게 광대로 비칠 뿐.”이라고 말합니다. 가우스의 마누라는 남편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알랑거리는 자는 결국 비겁자에 불과해요.” 가우스는 자신의 고향, 괴팅겐에 칩거합니다. 혁명전쟁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에 가담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사는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기이한 숫자만이 가우스의 관심사일 뿐입니다.

 

이에 비하면 훔볼트는 새로운 무엇을 모조리 알고 싶어 합니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무엇에 관한 학문적 가설들을 설정하고 실제 현실에서 이에 대한 범례를 찾으려고 합니다. 왜냐면 그의 가설들 또한 주어진 현실과 마찬가지로 변모를 거듭하기 때문입니다. 사물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훔볼트에 의하면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측정하는 훌륭한 이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계를 양적으로 파악하는 수단이라고 합니다. 독자는 가우스와 훔볼트 가운데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게 됩니다. 문제는 두 인물의 비교에 있습니다. 독자는 훔볼트라는 인물을 평가하기 위한 하나의 공식을 찾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은 마치 멍청함 내지 우둔함에 대한 투쟁 작업에서 활용될 수 있는 다목적 무기일지 모릅니다. 이에 비해 인간의 멍청함 내지 우둔함은 가우스에게는 결코 자신의 학문적 소재가 될 수 없습니다.

 

 

오성은 여러 법칙을 형성하게 하지요.”하고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평생에 걸친 학문적 작업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어디서 일하든 상관없습니다. 그게 질퍽거리는 화산 속이라 하더라도 그는 뛰어들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훔볼트의 말을 듣는 가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가우스는 수학자로서 해외여행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에게는 해외여행이 사치스러운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그건 칸트의 허튼 생각입니다. 오성은 어떠한 것도 산출해내지 못해요.” 작가는 이러한 식으로 두 사람을 비교하려고 소설을 쓴 것이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켈만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치 않습니다. 어째서 그는 과거의 학자 두 사람을 예로 들었을까요? 작가의 멋진 서술 방식은 매혹적이고, 과거 삶에 관한 에피소드, 가우스와 훔볼트의 조수, 봉플랑이 저지르는 에로틱한 행각 등은 약간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소설의 주제는 명징하지 않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하나의 의미를 던져주었습니다. 켈만의 소설은 오늘날 본연의 가치를 잃은 학문의 근본적 방향을 숙고하게 합니다. 산업 혁명은 기술 발전의 신호탄이 되었고, 에너지 개발은 강대국의 발전과 세계 대전 그리고 급기야는 자연 파괴와 기후 변화를 촉진했습니다. 자연과학자들은 오늘날 수많은 연구 발표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주었지만,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곤 합니다. 노벨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를 생각해 보세요. 그러나 이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기술 발전을 악용하는 정치가의 농간 때문이지요.

 

산업 혁명 이후로 정신과학은 자연과학과 분화되었습니다. 자연과학은 엄밀히 말해서 기술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가령 열대 지역의 자연사를 연구하는 것은 자연과학, 민속학 그리고 야생에 도사린 놀라운 진리를 깨우쳐 나가는 탐험입니다. 그것은 과학 기술을 통해 추구하는 경제적 이득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학문은 어떻게 치부되고 있습니까? 인문학자는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되고, 자연과학자의 연구 결과는 실용적으로 활용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양날의 칼로 활용되는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물은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세계의 측량은 수학적 공식이 아니라, 인간이 알지 못하는 자연의 이해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문명과 야생의 교류를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측정될 수 있습니다. 부갱빌의 타히티 탐험이라든가 훔볼트의 자연사 연구는 이른바 자본가의 일방적 이익 추구와는 의향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훔볼트는 야생에 대한 서양의 일방적 관점, 다시 말해서 유럽 중심주의의 시각을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열대 우림 지역을 탐색함으로써 서구의 자연과학의 시각을 눈 뜨게 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원시적 자연이 인간에게 얼마나 커다란 가르침을 선사하는지를 밝히려고 했습니다. 요약하건대 문명과 야생은 상호 교류를 통해서 상호 발전되어야 한다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 (1769 - 1859)

 

많은 서양 사람들은 문명과 야생의 교류와 협력 작업을 무시하고, 경제적 문화적 이득이라는 일방적 관점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는 식민지 쟁탈, 세계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오늘날 탄소 에너지 개발을 촉진하여 생태계 파괴 현상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고려할 때 자연사 연구는 문명과 야생을 공동으로 되살리는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서양인은 열대 지역에서 그들의 문제점을 해결할 방도를 찾고, 원시인들은 문명인과 소통하면서, 서구 문명의 장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연사 연구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 켈만은 이러한 중차대한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첫째로 그는 훔볼트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어떻게 협력했는지 전혀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훔볼트의 자연사는 열대 아메리카를 함께 탐험했던 동료 봉플랑 그리고 아메리카의 혼혈 학자들과의 협력 작업이 없이는 어떠한 결실도 맺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로 훔볼트는 아메리카 여행 이후에 프랑스 파리에서 22년 동안 머물면서 프랑스어로 저술 작업을 계속했는데, 다니엘 켈만은 이를 작품에서 무시했습니다. (이종찬: 훔볼트 세계사 自然史 혁명, 지식과 감정 2020, 77쪽)

 

소설 작품에는 훔볼트의 22년 동안의 프랑스어 저술 작업이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가우스와의 만남으로만 향할 뿐입니다. 이로써 작가는 학문의 분할되어가는 과정 내지는 사회로부터 학문이 서서히 소외되어가는 과정만을 피상적으로 서술할 뿐입니다. 요약하건대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아메리카, 에스파냐, 프랑스, 프로이센” 사이에서 학문 융합의 가교를 놓으려고 불철주야 노력했는데, 작가는 이러한 노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서구와 신대륙 서구 문명과 야생의 삶 등으로 비교되는 자연사는 오로지 만남과 교류를 통해서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학문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대부분 학자는 서재에 처박혀 공식을 골똘히 무언가를 사변적으로 만들어낼 뿐입니다. 그들은 모든 질문과 대답을 추상적으로 제기하고 논평하곤 합니다. 서로 모여서 소통하고 토론하며 의견을 주고받는 일을 소홀히 합니다. 언젠가 박노자 교수는 한국의 교수 사회를 마치 중세의 기사가 폐쇄적으로 머무는 성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학문 행위가 마치 물 흐르듯이 대학의 담과 국가의 담을 허물면서, 상호 교류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