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샤 칼레코 (1907 - 1975)는 독일 문학사에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 무명시인이다. 그미는 1907년 아우슈비츠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크르차노프에서 유대인의 딸로 태어나다. 칼레코의 가족들은 1914년에 독일로 이주하였으며, 1918년부터 베를린에서 살다. 재정적 이유에서 대학을 다니지 못한 칼레코는 회사의 비서직을 전전하며, 밤에 글을 쓰다. 1933년 시집 『속기 노트 시집 (Lyrisches Stenogrammheft)』으로 잠깐 문학적 명성을 얻었지만,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독일을 떠나다. 칼레코는 1938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1966년에는 다시 이스라엘로 이주하다. 그 후 1975년에 무명 시인은 취리히에서 사망하였다.
대도시에서의 사랑
마샤 칼레코
그들은 어딘가에서 대충 안면을 익히고
언젠가 때가 오면 랑데부에 자신을 던진다.
정확히 명명될 수 없는 어떤 무엇이 -
더 이상 서로 헤어지지 않게 유혹한다.
딸기 아이스크림 두 번째 먹을 때부터 반말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잿빛 나날 속에서
예견한다, 즐거운 저녁 시간 알리는 불빛을.
그들은 일상의 걱정과 괴로움을 나누고,
월급 외 수당의 즐거움을 서로 털어놓는데,
그 외의 말들은 그냥 전화로 해결한다.
그들은 대도시 혼잡한 번화가에서 만난다.
집에서는 불가능하다. 세 들어 사니까.
- 소음과 자동차 소리의 혼란 속에서,
- 수다쟁이 아낙네들의 손뼉 소리 지나치며
둘이서 조용히 걷는다, 손잡지도 않고.
그러다가 조용한 벤치에 앉아 입을 맞추고,
- 아니면 소형 보트 안에서 서로 애무한다.
사랑 나누기는 일요일로 제한되어야 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누가 생각할까?
그들은 구체적으로 말하고 드물게 얼굴 붉힌다.
그들은 장미도 수선화도 선물하지 않고,
집으로 심부름꾼을 보내지도 않는다.
주말여행, 입맞춤이 싫증나게 되면,
그들은 제국 우체국의 속기 전보를 통해
“끝이야” 한마디로 알릴 수 있으니까.
Großstadtliebe von Mascha Kaléko:
Man lernt sich irgendwo ganz flüchtig kennen/ Und gibt sich irgendwann ein Rendezvous./ Ein Irgendwas, - ’s ist nicht genau zu nennen -/ Verführt dazu, sich gar nicht mehr zu trennen./ Beim zweiten Himbeereis sagt man sich >du<.
Man hat sich lieb und ahnt im Grau der Tage/ Das Leuchten froher Abendstunden schon./ Man teilt die Alltagssorgen und die Plage,/ Man teilt die Freuden der Gehaltzulage,/ ... Das übrige besorgt das Telephon.
Man trifft sich im Gewühl der Großstadtstraßen./ Zu Hause geht es nicht. Man wohnt möbliert./ - Durch das Gewirr von Lärm und Autorasen,/ - Vorbei am Klatsch der Tanten und der Basen/ Geht man zu zweien still und unberührt.
Man küßt sich dann und wann auf stillen Bänken,/ - Beziehungsweise auf dem Paddelboot./ Erotik muß auf Sonntag sich beschränken./ ... Wer denkt daran, an später noch zu denken?/ Man spricht konkret und wird nur selten rot.
Man schenkt sich keine Rosen und Narzissen,/ Und schickt auch keinen Pagen sich ins Haus./ - Hat man genug von Weekendfahrt und Küssen,/ Läßt mans einander durch die Reichpost wissen/ Per Stenographenschrift ein Wörtchen: >aus<!
(질문)
1. 시인은 “그들”을 가리키면서, 일반 대명사인 “man”을 사용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직업은?
2. 그들이 커피숍이 아니라, 대도시의 번화가에서 만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3. 왜 사랑 나누기는 일요일 단 하루로 제한되어야 하는가요?
(해설)
칼레코는 거의 대부분의 삶을 회사 여직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미의 집필 시간은 다만 저녁 몇 시간에 한정되었습니다. 여성, 유대인, 가난 - 이것들은 평생 갈레코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미는 고향을 상실한 시인이었습니다. 1956년에 사람들은 그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베를린에 돌아오신 소감이 어떠세요? 베를린이 어때요?” 이에 대한 답은 간단했습니다. “글쎄요, 지금도 그곳을 찾고 있어요.” 칼레코의 시는 결코 한탄도, 소시민적 굴종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미의 시작품은 무례할 정도로 대담하며, 가난한 자의 슬픔을 꾸밈없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경직되지 않고 유연하지만, 전체적으로 체념의 정조를 짙게 드러냅니다.
앞에서 언급한 시는 대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직장 여종업원들의 사랑을 간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적 배경으로서 1920년대의 베를린의 도시의 모습이 은근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제국 우체국”이라는 시어는 20년대 독일이라는 구체적 배경을 말해줍니다. 젊은 연인들은 저녁 무렵에 “대도시 혼잡한 번화가에서” 만납니다. 일요일에 그들은 하루 종일 함께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커피숍에서 만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커피 한잔의 가격은 25 - 30페니히 정도였으므로, 단순 직장인들에게는 비싼 편이었습니다. 차라리 길가에 파는 아이스크림을 10 페니히 주고 사먹는 게 부담이 적었습니다. 연인들이 “아이스크림 두 번째 먹을 때부터 반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 집으로 애인을 데리고 갈 수 없었습니다. 세 들어 사는 노동자들은 월세 계약서에 “애인을 데려올 수 없다.”는 규정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곳은 기껏해야 공원 벤치 아니면, 소형 보트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젊은 연인들은 경제적 형편으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미래를 약속할 수 없었습니다.
일요일 오후 공원에서의 어설픈 입맞춤 그리고 부끄러운 애무 - 그것만이 20년대 가난한 독일 젊은이들의 애정 표현의 전부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성취에 대한 그들의 갈망은 차단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시민 공원이나 호수에서 머물지만, 그들의 낭만은 꿈속에서 화려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출전: 박설호, 새롭게 읽는 독일 현대시, 한신대 출판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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