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 기독교 속에는 반란이 담겨 있다. (3)

필자 (匹子) 2021. 7. 25. 10:02

(계속 이어집니다.)

 

상황은 그렇게 비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소련이 그렇게 고립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중국이 약간의 영향을 끼칠지 모릅니다. 또한 길은 옛날처럼 하나가 아닙니다. 마오쩌둥이 있고, 사회주의의 다른 방향도 있을 수 있지요. 어쩌면 중국의 사회주의는 오로지 중국적으로 머물고, 다른 나라에 적용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이는 블로흐의 착각이다. 중국의 사회주의는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의 영역을 벗어났다. 블로흐의 이러한 오류는 그가 1977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인지 모른다. - 역주) 그렇지만 다른 길은 반드시 있습니다. 서구에서 학생들만 활약했듯이, 소련에서처럼 지식인들만이 활약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언젠가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현실이 사고를 추동하지 못하면, 사고는 현실을 추동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만약 현실이, 그러니까 소련에서의 노동자가 무언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추동하면, 사실은 아주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추동이란 말로만 항의하고, 지적이고 고상한 성명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스트라이크라든가 보편적인 시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지칭합니다. 그러나 이는 다만 하나의 구상에 불과해요. 만약 우리가 마르크스주의를 추동하는 힘으로 이해한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변질된 마르크스주의는 계속 온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의 변종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에 의해서 반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처방은 마르크스주의이며, 이는 모든 지식인들의 항의에서 확연히 드러나지요. 만약 마르크스 사상의 변종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마르크스 사상이 그런 식으로 관청의 구호로 계속 머문다면, 바로 거기서 어떤 변화가 야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프리드리히 에버트의 다음과 같은 성공적인 발언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1919년 군대가 회군하려고 했을 때 군인들과는 약간 다른 정치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싶었습니다. “혁명 운동의 선두 주자를 꺾기 위해서, 나는 스스로 선봉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렇듯 오늘날 거대한 소련의 관료주의자들은 혁명의 선두 주자, 즉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꺾어 버리기 위해서,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선봉장이 된 셈입니다. 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어요. “정지되어 있으나 흘러가지 않는 현실에 따르면 Rebus sic stantibus et nondum frentibus” 어떠한 예언도 할 수 없습니다.

 

질문: 젊은 세대들은 전 세계적으로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핵심적 세계관 및 정치의식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어요. 이는 명확히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실제 사회주의 사회가 미래의 모델로 삼을 수 있는 사회주의 형태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가요? 비록 그게 인간의 현존재를 부분적으로 변혁시킨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블로흐: 당신의 질문에는 두 가지 사항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당신이 어떤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필요성 및 필연성을 느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당신이 불확실함, 즉 명료한 대답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어떤 나라의 범례를 찾아서 세밀하게 작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전될만한 모델은 이 세상 어디서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운동들이 계속될 뿐입니다. 사람들은 유고슬라비아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이라고 말하곤 하지요.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 잘 모르며, 중국의 사회주의가 과연 우리의 현실에 적용되기가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해빙기가 시작되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이루어질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열광하고 있어요. 체코에서는 이제야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이 보일 것 같다며, 사람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서로 끌어안곤 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는 프라하와 브륀에서 실제로 존재했지요.

 

어쨌든 해빙기 동안에는 사회주의의 몰락이 없었습니다. 이와는 정반대이지요. 관료주의자들이 몰락한 자로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우리는 어떤 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마침내 시민운동을 마르크스주의에 동일화시킬 수 있을 것 같다.’ 하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질문에 대해서 지정학적으로가 아니라, 각각 연대기적으로 대답할 수 있어요. 경직된 현실 상황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대에는 -소련에서도 해빙기가 있었듯이- 오래된 마르크스가 살아 있습니다. 새로운 마르크스, 젊은 마르크스 혹은 우리 시대의 마르크스 내지는 우리 문 앞에 서있는 단 하루의 마르크스가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요. 그는 도저히 살해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 혹은 자본주의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체념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지요.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불꽃을 지닌 이론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19세기의 소련 사회 노동당의 거대한 시대를 생각해 보세요. 마르크스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내가 다른 곳에서 자주 말한 바 있듯이- 확신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희망 속에는 위험이라는 카테고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반문하게 될 것입니다. 희망은 실망을 낳을 수 있는가? 이에 관해서 나는 튀빙겐에서의 첫 강연에서 분명히 대답했습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확신이요, 확정일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은 아직도 온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적이고 처벌받을 낙관주의가 아니라, 전투적 낙관주의입니다. 희망은 저절로 다가오지 않으니까요.

 

질문: 현대의 과학 기술이 발전되는 모습 속에는 미래주의적 설계들은 인류의 의식을 점점 더 강하게 사로잡고 있습니다. 우주의 영역을 급속도로 정복한다는 이유로 인류는 현존재의 완전히 새로운 다른 유형의 근본 문제와 봉착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지금까지 철학으로서,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라는 세계관으로서, 인간적 사회를 위한, 현재 주도적인 미래의 구상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매력 내지는 현실적 중요성을 잃어버리지 않을까요?

 

블로흐: 내가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어요. 질문 자체가 아주 기괴하기 짝이 없군요. 도대체 어디에 연결점이 있나요? 어쨌든 우리는 지구위에 살고 있으며, 지구는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작업은 톨레미적인 시각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극작가 뒤렌마트 Dürrenmatt는 달 위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는가? 어떤 영향을 낳을까를 고찰할 때, 자신의 역겹고도 실망스러운 느낌을 멋진 말로 표현했어요. “나는 톨레미주의자로 남을 뿐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지구가 중심 지역이지요. 우리는 지구위에 살고 있습니다. 휴식하는 바다 혹은 폭풍을 동반한 바다는 인간의 삶을 완전히 변화되거나 끝내기는커녕, 거의 조금만을 건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미래주의의 사기술에 관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현실도피적인 새로운 동기가 아닌가요?

 

자본주의는 이제 더 이상 천국이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자, 대안으로서 우주를 창안해야 했습니다. 이는 현실의 난문제를 회피하기 위하여 새로운 저세상으로 도피하려는 동기가 아니고 무언가요? 미국의 군수 산업 회사는 이러한 구상으로 엄청난 이득을 보고 있지요. 미래주의는 사람들의 관심사를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필요한 이데올로기입니다. 달 착륙과 지구에로의 귀환이 끝나면, 나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지요. 자본주의가 우주 운운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없애려고 하지만, 이는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달 위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우리에게는 기껏해야 8월에 사하라 사막에서 물 없이 방황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미래에 대한 전망은 지금까지 떨쳐버릴 수 없는 인류의 목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는 우주 과학의 입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래요, 미래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시민주의로 대치하기 위해서 고안한 형태에 불과해요. 중요한 사항을 교묘히 회피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미래주의는 하나의 추상적 유토피아에 불과해요. 이러한 것들은 지금까지 유토피아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언제나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서 고난의 현실과 아무런 관련성을 지니고 있지 않아요. 이에 비하면 기존하는 가능성을 냉정히 분석하는 일은 다음과 같은 부동의 목표를 위한 것입니다. 즉 계급 없는 사회의 건설, 생산 수단에서의 사유 재산의 철폐, 자본과 노동 그리고 주인과 노예 사이의 차이점을 철폐하는 일, 금치산 선고, 어려운 삶 무거운 죄를 짊어진 삶, 저열하게 취급당하거나 모욕당하는 삶을 철폐하는 일 등이 바로 그 목표이지요. 이 모든 것은 현실, 그것도 사회적 현실과 일치되는 것과 관련하여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외의 모든 사고는 하나의 도피일 뿐입니다. 언젠가 생시몽, 토머스 모어, 캄파넬라 심지어 플라톤 등이 그의 이상 국가에서 묘사했던 것으로의 축소화를 의미하지요. 미래주의는 쥘 베른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카를 마르크스 대신에 쥘 베른이라고요? 사람들은 이로써 만족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