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 나의 청년 시절의 친구, 루카치

필자 (匹子) 2021. 8. 4. 09:17

여기서 "나"는 장 미셀 팔미어를 가리키고. "너"는 에른스트 블로흐를 가리킨다. 이하의 인터뷰는 1976년에 행해졌는데, 다음의 문헌에 실려 있다.  Arno Münster (hrsg.): Tagträume vom aufrechten Gang, Suhrkamp: Frankfurt a. M. 1977. S. 102 - 106.

 

...........................

 

: 교수님은 어떤 외적 조건에서 루카치를 알게 되었으며, 어떠한 계기로 우정을 쌓게 되었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너: 언젠가 짐멜은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누군가가 세미나에 참석하고 싶은 헝가리 출신의 철학자를 소개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바로 죄르지 루카치라고 했어요, 당시에 나는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짐멜도 그를 잘 몰랐지요. 그래서 짐멜은 그와 한 번 대화를 나누어보라고 나에게 부탁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무슨 생각에 골몰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만나보니 루카치는 처음에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루카치에 관한 솔직한 인상을 짐멜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뒤이어 나는 부다페스트에서 엠마 리투크와 안면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짐작하시겠지요?

 

: 네. 리투크는 소설가이자, 루카치의 여자 친구였는데, 루카치의 저서 『영혼과 형식』에 관한 평론을 헝가리어로 써서 발표했지요? 당시 그미는 헝가리의 보수당인 니콜라우스 호르티 정권을 지지한 다음에 장편소설을 집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리투크는 루카치에 관해서 부정적으로 언급한 바 있습니다.

: 나에 관해서도 나쁘게 기술했어요. 리투크의 소설은 다름 아니라 『정신의 모험』이었습니다. 그미는 매우 반동적인 입장을 내세웠지요. 독일의 전쟁 참여에 관해서도 열광했고요. 언젠가 리투크는 나에게 루카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질문했습니다. 이때 나는 대답했어요. 그는 나에게 정말 대단한 인상을 남겼다고요. 결코 나쁜 의도가 담긴 말은 아니었어요. 이때 그미는 루카치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언젠가 루카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에마, 위대한 철학자라고 해서 그가 인간을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솔직히 말해 엠마 리투크가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사실입니다. 루카치의 발언 속에는 어떠한 쓰라림도 없었으며, 그미에게 앙갚음하려는 저의는 추호도 없었어요. 루카치의 발언은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지요. 어쨌든 루카치와의 우정은 어떤 도덕적인 측면에서 시작된 셈입니다. 왜냐하면 루카치는 윤리학을 저술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으며, 삶에서 어떤 심념을 실천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 당신과 만나기 전부터 루카치의 관심사는 어떠했는지요? 당시에 그는 미학의 어떤 시스템에 관해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는지요?

: 루카치는 당시에 『현대 극예술의 발전』이라는 제목의 두 권의 책을 헝가리어로 집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의 친구인 레오 포퍼가 이 문제에 관해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렇기에 루카치의 저서인 『영혼과 형식』의 첫 번째 에세이는 원래 레오 포퍼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레오 포퍼와 사귄 적이 없습니다. 루카치를 만날 무렵에 그는 이미 사망했거든요, 당시 포퍼는 미학을, 루카치는 윤리학의 책을 쓰기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친구가 사망한 다음에 루카치는 자신이 미학을 완성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나이가 든 다음에 루카치는 원래의 계획을 끄집어내어 자신의 위대한 미학을 집필하였지요.

 

그렇지만 나로서는 루카치의 미학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자주 만났습니다. 진정한 공생관계를 누렸다고나 할까요? 우리는 두 개의 서로 소통하는 관처럼 행동했습니다. 나는 항상 하이델베르크에 머물지 않았으며, 이따금 바이에른의 가르미시에 거주했어요. 몇 주 함께 있지 않을 경우 우리는 각자 유사한 주제로 글을 쓰곤 했습니다. 내가 찾지 못한 문제의 핵심을 그가 찾았으며, 그의 난제에 관해서 내가 해답을 찾곤 했어요. 우리 사이에는 정신적 유사성이 자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는 “어떤 차이를 알려주는 자연보호 공원”이 필요하다고 말할 정도였지요. 이러한 보호 공원은 반드시 필요했어요. 그렇게 해야 우리가 막스 베버 서클 사람들의 눈에 동일한 존재라 비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 두 사람 사이의 차이점은 어디서 나타났는가요?

: 그것은 인위적으로 나타났으며, 커다란 의미가 없었어요. 가령 예술과 신화의 영역의 토론에서 차이점이 드러나곤 했습니다. 이러한 의견 대립이 없었더라면, 지루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따금 동일한 물음에 대해 동일한 대답을 찾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 정치적인 문제로 두 사람 사이에 의견대립이 있었는지요?

: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루카치는 부유한 시민 가정 출신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은행장이었고, 금융 감독원의 대표였습니다. 그의 행동은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했어요. 그에 반해 나는 루드비히스하펜의 가난한 소시민 가정 출신입니다. 노동자의 궁핍함 그리고 빈부 차이의 고단한 삶에 관해서 강렬한 영향을 받고 있었어요. 그렇기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우리는 틈나는 대로 마르크스와 니체의 관계에 관해서 토론했지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니체의 초인에 관한 문제 말입니다.

 

1914년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루카치와 나 사이에는 거대한 의견 대립이 생겨났지요. 이에 관해서 우리는 막스 베버 서클 그리고 카를 야스퍼스의 작은 모임에서 논쟁을 벌였습니다. 독일에서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열정적인 애국주의라는 물결이 몰아쳤지요. 우리는 이를 혐오했습니다. 왜냐하면 프로이센주의에 대한 증오심은 바이에른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오리 자신의 노선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함께 여러 가지 정치적인 특성이 강하게 부각되었어요. 이는 젊은이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마르크스주의로 이끌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론만 접했을 뿐, 어떤 실천과의 연결고리를 습득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루카치는 다시 헝가리로 되돌아갔지요. 그는 나중에 벨라 쿤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 이 시점에서 루카치는 키르케고르와 도스토옙스키에 열광한 것으로 압니다. 이러한 사실도 당신의 철학에 영향을 끼쳤는지요?

: 당시에 나는 키르케고르와 도스토옙스키에 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분야에서 루카치는 나를 가르쳤지요. 대신에 나는 그에게 헤겔에 관해서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지요. 이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제각기 “차이라는 보호 구역”이 존재하는 셈이었습니다. 칸트에 관해서 우리는 서로에게 가르칠 게 없었어요. 루카치는 부다페스트에 있을 때 칸트를 공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부다페스트에서는 헤겔 철학은 대학 수업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 루카치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을 사귀었습니다. 옐리나 그라벤코라는 여성이었는데, 루카치는 자신의 책 『소설의 이론』을 그미에게 헌정했지요? 그미는 사회 혁명가였으며, 루카치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 같습니다. 루카치가 러시아의 도스토옙스키에 열광하게 된 것도 그미의 영향 때문인 것 같아요.

: 네, 루카치와 옐리나 그라벤코의 결혼은 매우 기이했습니다. 나 역시 발트 출신의 귀족 여성과 혼인했거든요, 그런데 루카치와 그라벤코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조화롭지는 못했어요. 우리의 두 여인 사이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고. 그 때문에 루카치와 나 사이의 관계 역시 약간의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를 커다란 문제로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루카치의 부인은 아나키즘의 성향을 지닌 적극적인 혁명가였습니다. 1905년 혁명 당시 우크라이나의 폭탄 테러에 연루된 바 있는 사람이었지요.

 

1930년 무렵에 그미는 침실의 베개에 폭탄 하나를 몰래 넣어두었는데, 그 위에 아기가 누워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때 그라벤코는 자신의 자식이라고 술회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미는 폭탄을 터뜨리는 임무를 맡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라벤코와 아기는 함께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 사건은 루카치의 윤리적 입장에 영향을 끼쳤지요. 루카치가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에 열광한 것은 놀랍지 않아요. 옐리나 그라벤코 자신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과 다름이 없었으니까요. 이러한 정치적 사건들은 무조건 결혼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미는 이러한 무정부주의적인 성향을 더 이상 지니지 않았으니까요. 당시 하이델베르크에서 함께 공부할 때 사람들은 이에 관해서 더 아상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루카치의 두 번째 부인인 게르트루트는 전혀 다른 타입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미는 국민경제학을 공부한 마르크스주의자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미는 일찍 사망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