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서로박: 청바지, 혹은 레비스트로스

필자 (匹子) 2023. 10. 5. 18:49

1.

신문을 펼치면, 이맛살 찌푸리게 하는 사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당신을 위해 편안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청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 네바다주에서 낡은 청바지가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약 120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몇 군데의 구멍을 제외하면, 아직도 얼마든지 착용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청바지는 일주일 후 인터넷에 소개되었습니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 회사의 가장 오래된, 귀한 제품으로 경매에 넘겨졌고, 4만 6천여 달러에 팔렸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긴 청바지의 제조업자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그는 룁 스트라우스라고 불리는 유대인 출신의 독일인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레비스트로스는 민속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는 동명이인입니다.

 

2.

1829년 룁 슈트라우스는 독일 밤베르크 근처의 부텐하임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룁의 아버지는 여러 곳을 방랑하는 상인이었으므로,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힘들어 했습니다. 룁이 채 16세가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부모의 도움 없이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계실 테지요? 룁은 등에다 생필품을 짊어지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녔습니다. 당시 독일의 법은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악재로 작용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무 일이나 할 수 없었고, 거주 지역을 함부로 옮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세금을 내야 했으며, 성년이 되지 못한 유대인들은 아예 일할 수도 없었지요. 남은 방법이라곤 미국으로 떠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룁은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3.

부텐하임에서 살던 룁은 대도시 뉴욕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룁”이라는 이름을 “레비”라고 바꾸었습니다. 그리하여 레비는 미국에서 새롭게 살게 됩니다. 처음에 그는 영어 구사에 몹시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람들은 레비의 서툰 영어 발음을 듣고 바이에른 출신 시골뜨기라고 힐난했으니까요. 당시 누구도 독일의 시골 청년이 불과 몇십 년 후에 미국의 거대 갑부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몇 년 전에 레비의 두 형은 미국으로 건너와서, 상인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형과 함께 머물까 하고 생각했으나 독립하는 게 낫다고 레비는 판단했지요. 그리하여 1853년에 자신의 물건을 챙기고,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캘리포니아의 서쪽 해안에서 레비는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4.

샌프란시스코 지역은 금을 찾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힘세고 싸움질 잘하는 자가 더 큰 이득을 차지하곤 했습니다. 살인, 절도 등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었습니다. 레비는 이에 겁먹지 않고, 금을 캐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상업이 자신의 적성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금방 체득합니다.

레비는 금 캐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합니다. 그의 매형, 데이비드 스턴도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레비는 노새에다 수레를 달아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그가 파는 물건은 매우 다양했지요. 단추, 곡괭이, 삽, 냄비 등 금 캐는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이면 죄다 팔았으니까요. 심지어는 텐트 그리고 마차 포장을 위한 천도 팔았다고 합니다.

 

5.

인생의 기회는 반드시 세 번 도래하는 법이지요? 레비가 맞이하게 된 첫 번째 기회는 미국 이민이었고, 두 번째 기회는 어느 일요일 오후의 사건이었습니다. 레비는 들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 금 캐는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한꺼번에 몰려드는 게 아닙니까? 몇 달 전에 레비와 데이비드는 천막 제조용의 천을 그들에게 판 적이 있는데, 천은 약속한 바처럼 방수가 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비만 오면, 천막 내부에는 빗물이 고이니, 돈을 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레비의 머리에는 순간적으로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천막 대신에 데님 천으로 그들의 바지를 만들어 주자. 데님 천은 물에 젖지만, 바지를 만들면, 그들이 평생 입고 다니지 않을까? 이후로 그들은 레비의 바지를 입고 몹시 만족해했습니다. 청바지가 훌륭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문이 쇄도했습니다. 그리하여 레비스트로스 청바지 제품은 1860년경에는 미국 전역에 팔려나갔습니다.

 

6.

같은 시기에 네바다의 레노 지역에는 미타우 출신의 제이콥 데이비스가 초라한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제이콥은 청바지, 말안장, 천막 등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제이콥은 청바지는 주로 주머니가 찢어지기 때문에 오래 입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양 끝에 구리가 박힌 튼튼한 주머니가 달린 청바지를 생산해내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제이콥은 특허를 신청하려고 했지만, 혼자 바지를 제작해서는 고작 68달러밖에 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7.

1873년 5월 20일 레비와 제이콥은 동업하기로 계약을 맺고, 특허를 신청합니다. 이로써 생겨난 청바지가 바로 금속이 박힌 “레비스 (레비 + 데이비스) 청바지”였던 것입니다. “레비스 청바지”는 그야말로 불티나게 의류 시장을 장악하게 됩니다. “레비스”는 청바지 상품 가운데 신화적인 아이템으로 자리하였으며, 이후 청바지 제품의 모범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청바지는 단순히 유행만은 아니었습니다. 레비스 청바지는 약 40년 동안 노동자의 훌륭한 복장으로 사용되었고, 50년대에는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상징적 의복이 되었습니다.

 

8.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은 청바지를 입고 영화 속에 등장하였습니다. 이로써 청바지는 저항하는 신세대의 옷으로 등극했습니다. 게다가 여성들도 청바지를 즐겨 입었습니다. 마릴린 몬로 그리고 브리짓 바르도 등의 육체파 여배우들은 거친 의상인 청바지 제품이 얼마나 멋진 성적인 매력을 드러내게 하는가를 알려주었습니다. 청바지는 60년대 70년대에 거역하는 세대의 전유물로 자리 잡지 않았습니까?

유행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찢어진 청바지 혹은 구멍 난 청바지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청바지 사이로 젊고 싱싱한 다리를 드러냄으로써, 젊은이들의 가슴을 몹시 설레게 만듭니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날렵하게 춤을 추는, 훤칠한 아이돌의 모습에 정신 잃은 채 매혹당하는 사람들 또한 존재합니다. 어쨌든 청바지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걸치기 편안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레비스트로스가 사망한 지 102년 되는 오늘날에도 청바지는 여전히 눈에 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