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모두가’하고 말할 때, 그들은 ‘모든 사람’을 떠올리지만, 남성이 ‘모두가’하고 말할 때, 그들은 ‘모든 남성’만 의식한다.” (마리 폰 에브너-에셴바흐)
1. 동독 출신의 소설가, 크리스타 볼프는 작품과 연설 등을 통해서 환경-, 평화- 그리고 여성 운동을 자극해 왔습니다. 만약 볼프의 문학을 연구한다면, 필자는 당시 유럽의 시대 정신을 구명하고, 블로흐의 철학적 모티프를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1985년 여름에 뮌헨대학교 헬무트 모테카트 교수Prof. Helmut Motekat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자본주의 분단국가에서 남자로 자라난 당신이 사회주의 분단국가에서 활동하는 여성 작가의 작품을 연구하면, 사고의 유연성을 키우고, 세계관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도서를 구매하려고 빌레펠트의 어느 서점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간판에는 “여성 서점”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직원으로 일하는 여성이 다가와, 다짜고짜 일갈했습니다. “이곳은 남성 출입 금지 구역이니, 당장 나가주세요.” 고객을 쫓아내는 가게가 있는 게 너무나 황당했습니다. 나중에 “내가 남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세요? 나의 몸가락을 본 적이 있나요?”하고 따지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여성 운동가들은 대체로 이유를 불문하고 남자들을 배제하거나 잠재적 가해자로 배척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페미니스트 가운데 남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나의 뇌리를 스쳤습니다.
2. 『에코페미니즘』의 역자 손덕수는 하나의 놀라운 사항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즉 인류 역사상 이어진 생명 파괴의 현상은 서구 자본주의의 가부장주의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서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활개 치는 가부장주의는 여성, 자연 그리고 제삼세계를 착취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성, 자연 그리고 이민족을 억압하는 주체는 한마디로 “백인 남성”으로 귀결된다고 합니다. (마리아 미스, 반다나 사바: 에코페미니즘, 창비 2020, 517쪽). 그런데 여기서 언급되는 “백인 남성”은 상징적 의미에서 다소 포괄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백인 남성 가운데도 여성-, 환경-, 평화운동을 지지하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백인 남성을 모조리 싸잡아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세우는 것은 확증 편향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3. 필자 역시 얼마든지 잠재적 가해자로 비난당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2019년 1학기 강의에서 나의 글, 「청바지 혹은 레비스트로스」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몇몇 수강생들은 수업이 끝난 다음에 마지막 단락 몇 문장을 삭제하라고 완강하게 요구했습니다. 여성의 몸을 물화시키는 표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여성을 어떤 성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물화시키는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에 처음부터 동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의 글 속에 그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지 이전에 전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자고로 여성이든 남성이든 젊은이들의 몸은 그 자체 아름답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몸을 오로지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일부의 시각일 것입니다. 나의 글에서 이러한 시각이 드러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4. 자고로 주어진 학문적 대상에 대한 사실 여부는 중등 과정에서 다루어집니다. 이에 반해 대학생들은 어떤 사실의 확인 작업을 넘어서서, 특정한 견해를 놓고, 서로의 의견 대립을 연습해야 합니다. 600년 이상 되는 독일 대학의 전통도 그러합니다. 인문학 교수는 자유 학예artes liberales의 강의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견해를 분석하고 토론하도록 유도해 나갑니다. 토론의 과정에는 듣기 싫을 정도로 야한 표현도 있고,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표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잘못된 발언은 합리적인 방법으로 비판해 나가면 됩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서 비판 의식을 유도해야 합니다. 부정의 부정은 비판의 활성화를 위해서 대학 수업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수단입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이 장단점에 관해 논쟁을 벌이지 않고, 기이하게도 나쁜 사실을 도입하는 선생에게 표독스러운 반응을 보이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나의 방법론이 어느 정도 서툴렀던 게 자명했습니다.
5. 어째서 몇몇 학생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문장의 내용을 선생의 견해와 동일시하려고 할까요? 나의 설명이 부족했을까, 아니면 토론을 유도하려는 수업 운영 방식이 어설펐던 것일까요? 아닌 게 아니라 오늘날 여성들은 엄청난 크기의 피해 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희롱, 성폭력은 물론이고, 몰래 카메라, 포르노 등의 유포는 여성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상처를 가하는 심각한 폭력 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여성들은 항상 피해의식을 느끼며,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페미니스트의 저항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며, 이를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여겨졌습니디. 언젠가 마리 폰 에브너-에셴바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성이 “모두가”하고 말할 때, 그들은 “만인”을 떠올리지만, 남성이 “모두가”하고 말할 때, 그들은 “모든 남성들”만 의식합니다." 그만큼 여성 차별은 남자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청바지에 관한 사항은 합리적 토론을 유도할 수 있는 테마로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뒤늦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6. 그래서 필자는 일단 몇 문장을 수정하기로 하였습니다. 문제는 몇몇 문장을 수정하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생각을 품으며, 학생들 사이에서 어떻게 토론하게 하는가 하는 물음이 중요합니다. 사실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성공한 레비스트로스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젊은이들은 성실성 그리고 창의적 사고에 대한 착상을 중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함께 필자는 수업 시간에 짤막한 글을 함께 읽었습니다. 몇몇 문장이 본의 아니게 여학생들의 피해 의식을 자극한 것이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필자는 처음부터 여성의 관점에서 청바지를 둘러싼 논의에서 어떤 미묘한 문제점을 미처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잘못은 나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몇 문장만이 아니라, 글 전체를 수정하기로 하였습니다.
7, 어째서 우리는 문제의 핵심을 간파하지 않고, 자구적이고 표면적인 부분에 혈안이 되어 있을까요? 지성인ein Intellektueller 은 말과 말 사이, 다시 말해서 "행간을 읽는 inter + lectere" 자이어야 하지 않는가요? 분명한 것은 나 역시 여성을 물화시켜서 고찰하는 족속들을 혐오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수정된 글을 읽으니, 나 자신이 어떤 일방적 사고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필자 자신이 남성 중심적인 무의식 속에 차단되어, 자신의 판단이 무조건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하다고 지레짐작했던 것입니다. 나 역시 “모두”를 말하면서 “모든 남자”만 뇌리에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페미니스트의 거친 발언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무시할 게 아니라, 그들의 표독스러움은 그 자체 남성중심주의가 사회 전반에 무의식적으로 뿌리내리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나는 절대로 성 갈라치기라는 전투적 대결의 현장에서 나 자신의 견해를 변화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역지사지의 태도로써 타자를 이해하고, 동시에 화이부동을 실천하는 일일 것입니다.
8. 한 가지 사항만은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누구는 청바지를 걸친 젊은 여자의 사진을 바라보며, 청춘을 의식하고, 누구는 패션 감각을 떠올립니다. 누구는 고결한 사랑을 연상하고 누구는 음탕한 짝짓기를 상상합니다. 자고로 주어진 하나의 상은 우리의 의식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수많은 형상으로 분산되는 법입니다. 보링의 인물화에서 누구는 젊은 여성을 바라보고, 누구는 노파를 고찰합니다. 이는 착시 현상의 결과가 아니라, 누구든 자신이 바라보고 싶은 무엇만을 고찰하려는 성향에 기인합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의 성급한 판단이 나타나지요.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하나의 “확증 편향”으로 인해서 단순한 사실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박권일: 메갈리아의 세계 지배, 한겨레 신문 2023년 12월 1일자 칼럼) 이를 고려하면, 어떤 그림을 하나의 유일한 상으로 고착시켜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요?
중국의 소동파의 시 가운데에는 "오도송(悟道頌)"이 있습니다. 溪聲便是廣長舌 계성변시광장설, 山色豈非淸淨身 산색기비청정신, 夜來八万四千偈 야래팔만사천게, 他日如何擧似人 타일여하거사인, "계곡의 물소리는 그대의 말씀이고/ 산의 푸른 빛은 그대의 몸이로다/ 간밤에 들은 84000의 노래를/ 어찌; 남들에게 알려줄 수 있으랴." 작품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합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이승은 하나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속의 별승은 84.000개"라고요. 그러니 우리는 이를 오로지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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