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학이론

서로박: 타우베스의 뒤섞인 정치 신학

필자 (匹子) 2022. 3. 22. 11:00

야콥 타우베스는 기이하게도 파시즘에 동조한 독일의 법 철학자 카를 슈미트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의식 있는 유대인 출신의 학자였지만, 카를 슈미트의 사상을 수미일관 추적하려는 자세에서 우리는 어떤 모순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극단은 서로 통하는 법일까? 우리는 타우베스의 입장에서 어떤 학문적 매혹 그리고 유대인 정체성 사이의 모순점을 접하게 된다. 야콥 타우베스의 태도에는 기이하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거부하려는 어떤 이율배반적인 특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에게서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주의를 부정하는 기이한 변절자의 면모가 엿보이는 것이다. 마치 사도 바울이 이전의 율법학자, 사울이라는 이름을 저버리고, 기독교에 개종했듯이, 야콥 타우베스 역시 유대주의 그리고 가톨릭 사상으로부터 서서히 거리감을 취했다. 유대교의 신비주의를 연구하는 종교사학자인 그의 은사,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은 지난 몇 년 동안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저버린 이유로 인하여 제자, 야콥 타우베스에 대한 비난 그리고 결별의 편지를 남겼다.

 

1947년에 발표한 그의 학위 논문 『서양의 종말론Abendländische Eschatologie』은 생전에 출간한 자신의 유일한 저서이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타우베스가 시간 개념을 “지속성durée”으로 이해하지 않고, “마지막 시간을 전제로 한 하나의 정해진 기간Frist”으로 파악한다는 사실이다. 2003년에 책 한 권이 간행되었다. 『사도 바울의 정치 철학』이 바로 그 책이다. 그는 1987년 죽기 전에 매우 아팠는데, 당시에 하이델베르크에서 4일에 걸쳐 강의한 바 있다. 책은 일견 이해하기 쉬울지 모르지만, 강의의 맥락 속에는 여러 가지 암시와 수수께끼가 가득 차 있다. 이를테면 어떤 비의적인 내용과 비밀을 암시하는 식의 표현이 많은데, 이로써 타우베스는 신학이 오로지 정치적으로 착색된 매우 위험한 영역임을 은근히 제시한다. 도래하는 죽음이 지성을 마비시킨 때문일까?

 

사도 바울의 정치 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법Nomos”이라는 개념의 폭발력이다. 타우베스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에 나타난 법에 대한 비판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여기서 도출해내는 것은 로마 제국이라는 세계 질서 그리고 인간의 자세와 관련되는 논쟁이다. 법보다 중요한 것은 바울에 의하면 빛과 생명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 이로써 바울은 율법 그리고 로마 제국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취해나간다. 마찬가지로 타우베스는 유대주의와 가톨릭 사상이 고수하는 “행위를 옹호하는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것을 법적 정당성 문제와 관련시킨다.

 

예컨대 법의 정당성은 인간 행위의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개념이다. 바로 그것이야 말로 “행위를 옹호하는 태도”로 귀결되고 있다. 가령 인간이 올바른 일을 행한다면, 신 앞에서 정당하고 자신을 떳떳한 존재로 내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 행위를 구명하는 척도가 된다. 인간 행위의 정당성은 유대교 그리고 가톨릭 사상에서 발견되는 성스러운 인간이 행해야 하는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타우베스는 행위를 옹호하는 태도 내지 율법의 정당성을 비판함으로써 유대주의 내지는 가톨릭 사상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가 프로테스탄트 종교가 추종하는 은총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는 수미일관 오로지 신의 은총만을 강조하였다. 인간은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루터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에 대해 전혀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요한의 묵시록은 모든 도둑 대장들이 속임수를 부리는 포대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간은 루터에 의하면 자신의 선한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신의 구원을 통해서 정당성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은 신약 신학에 의하면 "오로지 신의 은총에 의해서 sola gratia” 그리고 “오로지 믿음과 신앙에 의해서sola fides” 가능하다고 한다.

 

사도 바울 역시 선과 악을 따지는 율법에 중점을 두지 않고, 오로지 신의 은총과 인간의 신앙을 강조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타우베스는 유대주의로부터 등을 돌리고 기독교인이 된 바울을 옹호하고 두둔함으로써, 유대 사상에 도전장을 던진 셈이다. 그는 자신이 바울주의자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타우베스는 처음에는 발터 벤야민처럼 정치 질서의 신학적 정당화를 거부해 왔다. 그러나 『바울과 정치 철학』에 서술되고 있는 그의 논리는 이전의 입장과는 너무나 다르다.

 

야콥 타우베스는 자신의 책에서 사도 바울을 복권시키고, 초기 기독교 사상을 유대인 내부에서 출현한 사상적 발전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그의 은사, 게르숌 숄렘의 학문적 입장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사실 게르숌 숄렘은 유대주의를 표방하면서, 사도 바울을 저주하고, 역사적으로 드러난 유대주의의 구원 사상은 기독교의 내면의 사고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확실히 선을 그은 바 있다. 1982년에 발표한 논문 「메시아사상과 그 대가」에서 타우베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모든 메시아 운동은 실패를 거듭하다가 필연적으로 내면화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기독교 사상 역시 이러한 변화 과정을 거듭하였다고 한다.

 

가령 원시 기독교 사상은 17세기에 사바타이 체비Schabbtai Zvi라는 거짓된 예언자를 추종하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원래의 특성이 변질되었다고 한다. 사바타이 체비는 당국의 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에 이르러 이슬람으로 개종한 “자칭 메시아”였다는 것이다. 타우베스는 말년에 이르러, 한편으로는 프로테스탄트의 은총에 대한 입장에 동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종말론이 추구하는 전복되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거의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유대주의 그리고 가톨릭 사상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는 어처구니없는 변절과 다름이 없다.

 

타우베스에 의하면 기독교 교회가 진정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기독교는 유대교에 속하는 하나의 종파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는 바울의 기독교를 유대사상에 접목시키려고 한다. 게르숌 숄렘은 물과 기름이 섞이면 기름물이 되는가? 하고 반문한다. 여기서 우리는 타우베스의 입장이 대학살을 겪은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참담한 느낌을 가져다줄지 얼마든지 추론할 수 있다. 1963년에 발표된 논문 「마르틴 부버와 역사철학」에서 타우베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즉 종말론의 공동체의 이상은 다양한 역사적 구조 속에서 끝없이 변화되고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인류가 바라는 이상은 원래의 선함과 성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나 항상 나쁘게 변질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항상 신화적 우상을 숭배하지만,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신화적 우상이 올바르게 실현된 적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이러한 식으로 신화적 숭배를 처음부터 거부하게 되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사이의 차이점 그리고 신앙과 역사철학 사이의 이질성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타우베스는 이러한 이질성과 차이점을 없애는 것이 자신의 철학 행위의 관건이라고 믿는 것 같아 보인다.

 

타우베스의 논문집 "묵시록 그리고 정치"

 

메시아를 갈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순간에 하나의 커다란 의미를 깨닫는다고 한다. 타우베스는 이러한 생각에 이의를 제기한다. 종말론에 대한 기대감을 지속적으로 견지하다가 마지막에 맞이하게 되는 끔찍한 파국보다는 차라리 처음부터 체념의 내면화라는 자세를 취하는 게 차라리 더 현명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반유토피아주의의 입장에서 놀랍게도 골수 루터주의가 안고 있는 어떤 보수주의의 사고를 읽을 수 있다. 물론 타우베스는 정치적 보수주의를 지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종말론 뿐 아니라, 세계 변화를 추구하려는 모든 인간의 노력을 부질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을 수미일관 고수하는 태도는 타우베스에 의하면 그 자체 어리석다고 한다. 『사도 바울과 정치철학』에서는 이에 관한 사례가 수없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메시아를 갈구하고 구원을 기다리는 태도가 실제 현실에서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는 점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서양의 종말론』에 서술되고 있는 종말론의 긍정적 미래지향적 특성은 놀랍게도 차단되고 있다.

 

타우베스가 자신의 논거를 위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보다도 주어진 상황 그리고 적대자이다. 타우베스는 카를 슈미트가 애용하는 개념인 “구체적 상황” 외에도 주어진 현실적 상황에 아주 재빠르게 순응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상황에 따라서 마치 카멜레온처럼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질 수 있으며, 발터 벤야민처럼 “관여하는 방관자”로 처신할 수 있었다. 68 학생운동 당시에 취한 그의 소극적 행동은 이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타우베스의 『제식으로부터 문화로』라는 책에는 반동적인 유대주의 철학자 오스카 골트베르크Oskar Goldberg의 입장을 비판하는 글이 있다. 여기서 타우베스는 “인간은 문명의 혼란스러운 뒤섞임으로부터 근원의 순수성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라는 주장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 있다. 사실 야훼는 처음에는 살아있는 민중의 신이었다가, 나중에는 무력한 인간의 신으로 가치 하락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에서 체임 브라이스바흐 박사라는 기이한 인간으로 희화화되고 있다. 문제는 종말론을 맹신하면서,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의 시간에 구원을 기다리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있다는 것이다.

 

타우베스는 언젠가 오도 마크바르트Odo Marquard와의 논쟁에서 그렇게 행동을 취했던 것처럼 신화의 다양성 그리고 신들의 갈등과 경쟁에 관한 멋진 묘사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오로지 유일신만 생각하면서 다른 여타의 내용을 배척하는 것보다는, 역사철학에 나타난 세속화된 구원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더 멋지게 살아갈 수 있다고 지레짐작하는데, 이는 타우베스에 의하면 착각이라고 한다.

 

타우베스는 신화적 이야기와 신들의 경쟁에 관해 경박하게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어떤 새로운 다신론이야 말로 다원주의 사회에서 허용되는 마지막 자유의 외침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잘 숙지하고 있다. 문제는 오늘날 제기되는 새로운 다신주의의 분위기가 시나이 반도에 존속되는 유대인들의 동맹을 차단시킬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타우베스는 그리스 신화에 대한 관심사가 결국에 이르면 이스라엘 국가에 하나의 위험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바로 이 점이야 말로 타우베스가 변절한 유대인, 사도 바울처럼 1980년에 이르려 유일신의 사고에 집착하는 근본적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