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현대영문헌

서로박: 루시디의 악마의 시 (3)

필자 (匹子) 2018. 12. 30. 10:26

10. 지브릴의 꿈과 환영: 지브릴의 꿈과 환영은 정신분열증의 증세로 인하여 더욱 극단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설의 4분의 1의 분량이 주인공의 상상적 현실상으로 채우고 있을 정도입니다. 소설의 중간에 지브릴은 어떤 알 수 없는 질병으로부터 일시적으로 자신의 건강을 되찾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회복기의 과정 속에서 믿음을 상실하고, 이슬람의 도덕적 법칙과 대치되는 생각을 품는다는 데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의식을 잃게 되었을 때 지브릴은 마치 대천사 가브리엘처럼 꿈을 꿉니다.

 

가령 지브릴은 제 2장에서 메카의 자힐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꾸란그리고 악마의 시가 탄생할 때 자힐리아가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 보고합니다. 이슬람의 성서가 탄생할 무렵 자힐리아의 세 명의 신이 꾸란의 집필을 위해 동원되었는데, 나중에 다시금 배척당했다고 합니다. 자힐리아 Jahiliyyah는 아라비아어에 의하면 망각된 시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다면 가브리엘은 두 번씩 나타나 사탄으로서 예언자, 마하운드에게 신의 말씀을 전했단 말일까요? 선과 악,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 사이의 한계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하고 지브릴은 묻고 있습니다.

 

11. 지브릴의 환영 속에 나타난 예언자들의 기이한 이야기들: 4장부터 제 9장에 이르기까지의 에피소드들은 지브릴의 환영 속에 떠오른 것입니다. 4장에서 천사는 런던에서 망명 중인 이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곳에서 이맘은 아이샤 데시 여왕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샤 데시 여왕의 배후에는 알 라트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알 라트는 가장 막강한 신, 자힐리아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맘이 그미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자, 여왕과 알 라트는 이맘이 시간 이전과 시간 이후의 시대를 다스릴 수 있도록 그를 도와줍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 경건한 아이샤의 이야기가 제 8장과 제 9장에 이어집니다.

 

아이샤는 ,인도의 티디푸어라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처녀였는데, 그 지역 사람들은 아이샤의 뒤를 따라 멀리 도보 여행을 떠납니다. 그들은 아라비아 해를 건너서 거의 맨발로 메카로 향하게 됩니다. 9장은 마하운드가 어떻게 메카로 돌아오게 되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인, 바알과 함께 이곳저곳을 배회하였는데, 더 이상 바알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메카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인 바알은 홍등가에 머물면서, 몸 파는 여성들에게 예언자를 모시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들 각자에게 고결한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업적으로 번창할 수 있다는 게 시인, 바알의 지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알은 당국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게 되는데, 처형되기 직전에 마하운드를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왜냐하면 마하운드는 어려움에 처한 자신과 창녀들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브릴의 꿈은 예언자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12. 이슬람 종교와 회의주의적 시각: 작품 속에는 주요 줄거리를 보완해주는 보조 에피소드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소설의 핵심적 테마에 해당하는 믿음과 의혹 사이의 갈등을 심도 넘치게 전해줍니다. 가령 선과 악,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무엇, 사랑과 증오심, 복수와 용서 현실 안주와 망명, 삶과 죽음, 현실과 가상 등을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대립 구도는 소설 내의 긴장감을 부추길 뿐 아니라, 주인공의 내면적 갈등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작품에서 언급되는 어떠한 주변적 사건도 그리고 등장인물도 별도의 관점에서 해석되거나 이중적 대립 구조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악마의 시의 화자 가운데 한 사람인 지브릴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렇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너무나 오래 망각된 시간이었으므로.이 말은 작품의 핵심적 격언으로서 작가의 급진적 회의주의를 강하게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결코 이슬람의 믿음이라든가 예언자를 무작정 신봉하지 않는 게 분명합니다.

 

13. 신으로 향하려는 노력: 작품에서 여행은 안식처를 찾으려는 시도로 이해됩니다. 두 주인공이 영국에로의 망명을 시도하고 마지막에 이르러 망명을 종결짓는 대목은 그 자체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두 등장인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하운드, 이맘, 아이샤의 경우에도 분명하게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지브릴과 살라딘은 각자 이전의 삶의 방식을 끝내고, 새롭게 출발하려 합니다. 소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너는 일단 죽어야 한다.이 문장은 주인공 지브릴이 신앙의 영역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려는 갈망의 시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알레루이냐 콘은 높은 빌딩에서 추락하여 사망합니다. 산악 등반은 그미에게 위대한 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 그 자체였습니다. 이는 미치 마하운드가 신에게 다가가서 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언제나 코니 Coney 산정을 등반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14. 지브릴의 망상 그리고 비극적 최후의 의미: 지브릴은 자신이 배우로 출현하는 영화 속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난파를 극복하고 현실 세계로 돌아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 살라딘의 거짓말에 현혹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알레루이야가 다른 남자의 품에 인기는 모습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이러한 망상 속에서 그는 더욱더 비현실적인 상상의 세계 속으로 침잠하게 빠지게 되어, 급기야는 자신이 어떤 놀라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지브릴은 자기 자신이 신의 말씀을 전하려 세상에 태어났으며, 자기 자신이 마하운드와 바알, 이맘과 아이샤 등의 배후에서 그들을 조종하고 무언가를 돕는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지브릴은 오로지 자신만이 죄인들을 처벌하고, 끔찍한 원죄가 창궐하는 런던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예컨대 영국의 대도시 런던은 주인공에게는 (바빌론과 런던의 합성어인) “바빌론돈Babylondon이라고 명명되고 있습니다. 물론 지브릴은 과거에 인도의 힌두시 신이 거처하는 신전의 영향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존재와 가상의 한계를 뛰어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마치 마하운드가 자신의 비극적 고통을 나중에 바알에게 앙갚음하듯이, 주인공이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게 된 사실 역시 한 배반자에 대한 신의 복수로 이해될 수 있을까요? 지브릴이 마지막에 자살로써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는 것은 과연 선에 대한 악의 승리로 해석될 수 있을까요?

 

15. 인간의 삶은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종교적 계율과는 다른 차원의 무엇이다.: 물론 살라딘 역시 주어진 현실상과 가상적 현실상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혼란을 느낍니다. 살라딘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저버리고, 영국 문화를 애호하는 인도 사람입니다. 그는 천 개의 목소리를 지닌 성우입니다. 살라딘은 낯선 무엇에 매혹되어, 인간의 모든 목소리를 흉내 내다가, 끝내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살라딘은 불평꾼으로 살아가다가 어떤 악취를 풍기는 동물로 변신하게 되는데, 이 역시 신의 처벌로 이해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이 와중에서 인간의 형체를 되찾게 되는 것일까요? 어째서 지브릴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그의 사악한 계획이 일시적으로 수포로 돌아가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두 주인공의 삶을 고찰하면 선과 악, 용서와 보복은 서로 뒤엉켜 있을 뿐입니다. 이는 마치 성스러운 특성 그리고 홍등가에서의 세속적 특성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소설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합니다. 즉 지브릴이 세계로부터 멀리 벗어나 머나먼 상상의 현실 속으로 침잠하게 되면, 그럴수록 지금 여기의 삶의 의미는 더욱더 명징한 무엇으로 밝혀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Bildergebnis für die satanischen verse

 

루시디의 작품에 항의하는 중동 사람들.  그들은 루시디 문학의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16. 세상은 하나의 일원적 가치에 의해서 구조화되어 있지는 않다, 혹은 혼종의 문화: 소설은 독자에게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즉 제 3세계의 사람들 그리고 영국에 거주하는 인도 망명객들이 더 이상 구속된 삶을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작품은 생소화의 효과를 드러내고, 아이러니, 패러디, 사타이어를 활용하며, 현실과 가상 사이의 관계 등의 서술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작가는 어떠한 정치적 종교적 지배 구조라 하더라도 이에 승복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작가 살만 루시디는 마하운드가 이슬람 종교를 창시할 무렵의 지배 구조를 용납하지 않으며, 영국에 온존하는 백인 인종주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그는 예루살렘에서 출현하는 급진적 테러를 반대하며, 인도에 횡행하는 힌두교 문화에 무조건 빠져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소설의 등장인물 지브릴과 살라딘 그리고 다른 주변인물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작가는 영국의 식민지 지배 그리고 인도의 상업화된 삶을 모조리 까발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여러 문화가 어디서든 간에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이를 거부하는 태도는 주어진 역사적 변화에 눈을 감는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