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서로박: 윤노빈의 한울 사상 (3)

필자 (匹子) 2020. 9. 9. 17:57

9. 무신론을 뒤집은 인간신 사상: 사람이 한울이다.”라는 전언은 궁극적으로 왜 신은 인간인가? Cur Deus homo?라는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적 질문에 대한 해답과 같습니다. 포이어바흐는 신은 인간이 떠올린 하나의 가상적인 상이라는 점을 밝히려고 했습니다. 이로써 포이어바흐는 신의 권위적 허구성을 허물고 종교의 무신론을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윤노빈은 신이 없다는 단순한 확인을 넘어서서,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악마의 탈을 벗어던지고, 신으로 격상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예를 인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 악마가 심화시킨 편협한 자아의 존재 구속성에서 벗어나 찬란하게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는 오로지 사람들끼리 상호부조하고 아우르며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과의 진정한 조우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신의 아들이 보낸 성령과 조우함으로써 믿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의 인간신으로 발돋움할 수 있습니다. 성령과의 조우는 죄악과 불의, 고통과 감금을 인식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큰 자아로서의 한울, 우리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고, 진리와 정의에 대한 소시민들의 이른바 무관심신경질이라는 보편적인 아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에른스트 블로흐는 은폐된 인간 homo absconditus의 개념으로써 인간이 신과 같이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비유적으로 지적한 바 있습니다. (Bloch: 126) 마찬가지로 윤노빈 사상에 나타나는 인간신의 개념을 추적함으로써, 우리는 현대인들이 오늘날 좌시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인간학 내지 인간학적 신학을 축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 협동하고 도와주는 한울님의 특성 (1):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울의 협동적 행위로서의 사랑입니다. “서로 일으켜주며, 서로 붙잡아주며, 서로 구원해주며, 서로 도와주며, 서로 가르쳐주며, 서로 생각해 주며 사람들은 함께 살아 있다.” (윤노빈: 295). 우리는 악마에게 맡긴 힘을 되찾아 와서, 서로 아우르면서 협동하면 족합니다. 그렇게 되면 불신, 감금, 미움, 갈등, 분열 등의 연결고리는 저절로 끊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윤노빈은 인간의 자연 상태를 협동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생명체 및 다른 자연환경과의 싸움에서 사람들은 서로 반목하기는커녕 서로 힘을 합쳐 뭉쳤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홉스 식의 인간은 인간에 대한 늑대이다. Homo homini lupus라는 공식은 인위적이고 왜곡된 사회계약설에 불과합니다. (윤노빈 73: 199). 진정한 삶을 생존이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신앙은 한울의 자유와 생존, 해방과 초월을 도모해야 합니다. 이와는 다른 맹목적 신앙은 뜻 모르고 중얼거리는 기도는 혀의 부질없는 무용이며, 뜻 모르고 중얼거리는 주문은 입술의 부질없는 풀무질일 뿐이라고 합니다. (윤노빈 73: 32). 한울의 협동적 행위로서의 사랑의 범례는 오로지 한울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무엇입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두레 공동체의 울력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무엇보다도 동학사상과 동학 운동에서 그 단초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11. 협동하고 도와주는 한울님의 특성 (2): 윤노빈은 논문 동학의 세계사상적 의미에서 협동하고 도와주는 한울님의 특성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 그것은 시천, 양천 그리고 체천의 의미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시천 侍天은 한울을 모신다는 의미로 이해되는데, 이는 최제우의 사상과 삶과 관련됩니다. 우리는 나의 곁에 계시는 한울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양천 養天은 한울을 키운다는 의미로 이해되는데, 이는 최시형의 사상과 접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 배우려는 분을 키우고 가꾸어나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체천 体天한울의 정신을 실천에 옮긴다는 의미로 이해되는데, 이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학혁명 운동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신의 존재가 수직적 구도 내지 시간적으로 구분되는 존재라면, 시천의 주인과 양천의 주인 그리고 체천의 주인은 사람과 동등한 위상을 지닌, 동시적인 분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자고로 인간은 자신의 노력과 판단에 따라서 악마 내지는 지적 야수의 길을 걸을 수 있으며, 이와는 정반대로 천사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윤노빈은 다음과 같이 일갈합니다. “사람은 사람의 부모이며. 사람은 사람의 사형집행인이다.” (윤노빈: 271)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악마의 영향으로 이웃을 죽임으로 몰아갈 수 있지만, 다른 한 편 선한 노력을 통해서 신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12. 한울타리의 세계관: 그렇다면 한울은 어떻게 존재론적으로 구명될 수 있을까요? 윤노빈에게서 한울의 개념은 물리적 차원과는 다른 형이상학적 영역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이른바 서양의 수직구조로 설정된 상부내지 저세상의 영역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서상 사람들은 하늘을 우라노스, 크로노스 그리고 주피터 등이 막강한 권능을 행사하는, 수직 구조에 바탕을 둔 공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것은 상부로서의 천국으로 처음부터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윤노빈은 하늘을 어떤 비어있는 공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유불선에서 이해되는 무우주론 無宇宙論의 세계관에 입각한 것입니다. 윤노빈에 의하면 하늘은 없고, 한울이 있습니다. 하늘은 윤노빈에 의하면 높이 떠 있는 우주의 뚜껑이 아닙니다. 우리의 방석과 우리의 등 받침과 우리의 팔걸이가 바로 하늘이라고 합니다. (윤노빈 73: 323).

 

더 큰 자아로서의 는 한울타리 속에서 살아갑니다. 한울타리의 세계관은 이승과 저승이 일도양단되지 않는 노장사상의 관점 또한 연계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죽지만, 인간에 대한 기억과 신뢰는 후세인들에게 살아 있습니다. 인간은 실제로 개별적 존재이지만, 사고 속에서는 한울입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우정, 임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한울의 여러분들을 서로 결속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늘은 상부 내지 저세상으로서의 높은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 속에 자리하는 영역으로서의 한울”, 바로 그것입니다.

 

한울의 공간이 비어있는 까닭은 누구보다도 인간에게 속하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 다시 말해서 건과 곤은 서로 아우르면서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로써 신정주의의 체계는 완전히 파괴되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행동하는 임으로서의 하는님일 수 있으며, 나아가 전체 (全体)로서의 한울 (한울타리)”의 안녕을 도모하는 임의 존재로써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습니다. 윤노빈은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말합니다. “이웃이 한울나라다.” (윤노빈: 327)

 

13. 우주의 꽃으로서의 생존: “생존은 윤노빈 사상의 핵심적 사항입니다. 윤노빈은 인간의 본질을 생존이라고 규정하고, 이것을 막힘없이 (無窮) 피어나는 우주의 꽃이다.”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생존은 한울 속에 가득 핀 무궁화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윤노빈은 최시형의 시 降詩를 인용합니다.물은 네 바다 한울에 흐르고, 꽃은 만 사람의 마음에 피었어라. 水流四海天 花開万人心.” (윤노빈: 292) 이러한 발언 속에는 시각적이자 요소론적으로 차원으로 파악되는 존재론이 아니라, 협동과 해방에 토대를 둔, 서로 아우르는 인간의 관계론 내지 상호성의 자아가 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체와 주체의 구분을 극복하는 간주관적인 상호성 내지 협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 사람의 마음에 핀 꽃은 생존하는 큰 자아를 가리킵니다. 상호성의 자아는 서구의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일방적인 주체 내지는 개인으로 차단된 휴머니즘의 범주를 벗어날 뿐 아니라, 나아가 스피노자 Spinoza의 범신론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는 서로주체성내지 상호 주체성의 의지를 표방합니다. 더 큰 나, 나를 임신한 나, 상호성 속의 자아는 인민들에게 가해지는 질시, 모략, 미움, 간계, 감금 그리고 분단을 떨치게 하고, 찬양, 협동, 사랑, 상호부조, 해방 그리고 통일 등을 추구하게 합니다. 더 큰 나, 나를 임신한 나, 상호성의 자아야 말로 인위적인 날조를 예리하게 깨닫게 하며, 이를 협동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