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서로박: 윤노빈의 한울 사상 (4)

필자 (匹子) 2020. 9. 9. 17:58

 

14. 사고는 협동적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간은 신의 섭리에 따라 유동하다가 사라지는 티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는 상대방의 응답 속에서 언제나 우리일 수 있습니다. (김상봉: 287). 인간의 행위는 우주 전체를 고려할 때에는 휴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윤노빈에 의하면 소우주로서의 인간은 오로지 상호 도움을 통해서 대우주에 해당하는, 자연 속의 불카누스를 포괄하는 가장 고귀한 생명체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시는 인간은 모든 불신, 거짓, 갈등, 싸움, 구속, 분단 등을 극복하고, 같은 생각을 공유하며, 이웃과 한울타리 속에서 서로 협동하고 살아갈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유 (思惟)는 윤노빈에 의하면 사유 (私有)가 아닙니다. (윤노빈 73: 262). 지금까지 한국 사람들은 고통, 감금, 불신 그리고 분단이라는 질곡에서 살아왔습니다. 만약 분단을 극복하고 해방을 이룰 수 있다면, 배달민족의 생존은 이를테면 위로 솟아오르는 포르피리오스의 나무가 아니라, 생명의 가지를 옆으로 퍼뜨림으로써 많은 열매를 제공하는 포도나무로 비유될 수 있다고 합니다. (윤노빈 73: 293). 협동적 생존과 관련하여 윤노빈은 사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생각은 일방적 지배관계가 아니라, 기능적 상호 협조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명제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윤노빈 72: 126).

 

15. 동학의 세계사상적 의미: 인간은 본질적으로 우주의 꽃이지만, 주어진 현실에서는 억압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와 본질 사이의 거대한 위화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윤노빈은 무엇보다도 동학의 정신에서 하나의 해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착취와 정복의 욕망을 감춘 채 극동으로 파고든 서양의 학문은 결국 동학을 창조하게 하였습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동학은 처음부터 사랑과 단결이라는 정서 외에도 저항과 거역의 자세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과 단결 그리고 저항과 거역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울을 모시고 (侍天), 한울을 키우며 (養天), 한울을 실천하는 (体天)의 사상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윤노빈은 세 가지 중요한 사항들 가운데 특히 해월 최시형의 양천 (養天)”을 가장 귀중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한울을 키우는 과업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까닭은 거기에 어떤 새로운 깨달음, 갱생 속에 도사린 과정이라는 함의 그리고 진리의 전달과 가르침이라는 방법론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한울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깨닫고, 지금까지의 살아오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뒤집으며, 결국 더 나은 생존의 길로 향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초월, 해방 그리고 통일이라는 목표가 가능성 내지 과정으로서의 한울을 키우는 작업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수단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16. 윤노빈의 한울 사상은 생태계와 관련되는 생명 사상과 직결되지 않는다.: 생존에 관한 윤노빈의 사상은 자연에 대한 이기적 태도를 취하는 서구의 휴머니즘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서구의 휴머니즘이 개인 주체의 존재론적 가치를 부각시키는 반면에, 윤노빈은 사고의 공유화를 주창하며, 이와 관련하여 더 큰 자아 Atman”, “나를 임신한 나라는 보다 포괄적인 한울의 삶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타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윤노빈의 한울 사상은 고통, 불신, 억압, 구금 그리고 분단에 대한 극복을 우선적으로 추구합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협동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윤노빈은 한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도종법경 (道宗法経)의 구절을 인용합니다. “사람이 바로 한울덩어리오/ 사람이 바로 만물의 정기니라/ 사람이 바로 한울이오/ 한울이 바로 사람이니/ 사람밖에 한울 없고/ 한울 밖에 사람 없다. 人是天塊也 天是万物之精也 人是天 天是人 人外無天 天外無人

 

비록 윤노빈 사상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교감에 근거한, 이른바 접화군생 接化群生의 입장이 부분적으로 엿보이기는 하지만 윤노빈의 사상은 엄밀하게 신생철학에 국한할 경우 흔히 말하는 생태계와 관련되는 생명사상과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배달의 생존을 방해하는 거짓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과업을 일차적인 관건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율려 등을 언급하면서, 이를 윤노빈의 사상에 원용하려고 한다면, 이는 윤노빈 사상을 결과론적으로 뒤집어 해석하려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1970년대에 출현한 신생 철학의 사상은 주어진 시대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역사적 비판적 태도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