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달민족에 대한 충직한 조언: 『신생 철학』은 현세에서 고통당하며 목숨을 이어가는 분들의 피와 땀과 관계되는 문헌입니다. 그것은 식자들을 위한 현학 서적도 아니고, 부유층 자제를 위한 교재도 아니며, 배부른 자세로 주문을 외는 사제들을 위한 교리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억압과 강제 노동에 시달리며, 무거운 짐을 진 채 살아가는 인간을 위한 지침서와 같습니다. 1973년에 간행된 윤노빈의 『신생 철학』은 세상에서 가장 핍박당하는 민족, 그것도 배달의 민족을 위한 충직한 조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책은 모든 “인위적 人為的”이고 “인위적 人偽的”인 억압, 강제 노동, 감금, 고통, 죽임 등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이러한 부자유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해방 Exodus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수미일관 모색하고 있습니다. 윤노빈이 서양의 철학 사상 외에도 유대교와 기독교의 메시아사상, 페르시아에서 유래하는 조로아스터 종교의 전투적 이원론, 유불선, 노장사상 그리고 동학사상 등에서 자신의 사상에 대한 본질적 모티프를 발견하려 하는 것도 그러한 실천적 가능성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2. 서양의 시각적 요소론적 사고에 대한 비판: 윤노빈은 세계를 대하는 서양의 관찰방법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서양인들은 무엇보다도 눈 (目)을 통해서 모든 사물과 세계를 “요소론 要素論”적으로 규정합니다. 모든 대상은 마치 요소와 같은 객체로 투영되고 있습니다. 눈은 있는 것만 바라보고, 살아 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움직임 역시 철학자 제논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정태적인 상의 연속적 변화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가령 고대 그리스에서 발달한 양분법적 논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본질, 영혼, 형상, 신, 주관 그리고 주인은 비본질, 신체, 질료, 인간, 객관 그리고 노예와 수평적 평등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대립관계에 설정되어 있습니다.
수직적 지배구조의 대립관계는 바로 명사적 요소론적 시각에 의해서 처음부터 정당성을 획득했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사물은 물론이며, 생동하는 모든 생명체들을 오로지 사물로, 즉 “유물론적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이것들을 명사적으로 구분하고 차단시키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물론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아니라, 가시적인 물질의 상으로, 다시 말해 세상을 물화시켜서 바라보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관념론 역시 이러한 특성에서 결코 제외되지 않습니다. 윤노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계를 소유하기 위하여 세계를 실체와 원소와 본질에다 감금하며, 인간을 소유하기 위하여 정의와 개념에다, 그리고 철창 속에다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가두는 것이다.” (윤노빈: 67)
3.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 이와 관련하여 눈 (眼)은 “쪼개는 칼”로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깔봅니다. 바라보는 주체가 세계보다 더 나은 존재로 이해되므로, 모든 사물과 생명체가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동사를 명사화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류의 톨레미적 전환이다. 세계를 소유하기 위라여 세계를 실체와 원소와 본질에다 감금하며, 인간을 소유하기 위하여 정의와 개념에다, 그리고 철창 속에다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가두는 것이다.” (윤노빈 73: 67).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을 분할하고, 물화시키며, 수직구조로 파악하려는 배후에는 그것들을 소유하고 정복하려는 남성들의 야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는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 Divide et impera”라는 정복자의 소유욕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정복자의 권력 및 금력을 지향하는 욕구는 서구의 실용주의와 접목되어, 역사적으로 다른 인종, 여성들, 생각을 달리하는 분들을 수없이 탄압하고 구속하게 하였습니다.
윤노빈은 요소론의 세계관 속에 분단과 지배의 논리가 숨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분할하고 통치하기 위해서 서양의 사상가들은 포섭의 수직 논리를 강화해 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의도는 모순 논리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사실과 사태에 대한 판단은 실제 현실이라는 하나의 잣대에 의해서 행해지는 게 아니라, 인간의 의식 속에 투영된 현실, 다시 말해서 상상 속의 현실이라는 잣대에 의해서 행해지기도 합니다. 전자가 실제 현실의 기준이라면, 후자는 이른바 변증법적인 현실의 기준입니다.
헤겔의 모순 개념, 프로이트의 모순된 정서인 부리당의 당나귀 등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 잣대에 의해서 해명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양분법적 지배 논리 내지 포섭적인 지배논리는 바로 이러한 변증법적 지배의 논리에 의해서 강화되어 왔습니다. 가장 표독스러운 서양의 양분법적 논리의 칼은 다름 아니라 한반도의 군사 분계선이라고 합니다. (윤노빈 73: 91쪽) 따라서 한민족의 생명을 옥죄이는 선이 바로 휴전선 DMZ인데, 이는 단순히 정치적 분단의 의미를 넘어서서,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는 서양의 지배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살인의 줄”이라는 것입니다.
4. 악마는 이간질하는 존재이다.: 인민의 자연스러운 살림을 방해하는 존재는 악마로 규정됩니다. 악마는 교활하게 사물을 강탈하고, 땅을 차단시키며, 무고한 사람들을 감금하는 자입니다. 어원을 고려하면 “악마 διάβολος”는 두 사람을 이간질시켜서 “물속에 내팽개치는 βάλλειν”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악마는 사탄과 같은 초능력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윤노빈에 의하면 중상 모략하는 자들로서, 사탄과 같은 초능력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들 속에 뒤섞여 있습니다. 제 3자에 관한 나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그의 일과입니다.
그렇기에 악마는 싸움을 붙이는 야수로서, 불신, 분열, 갈등, 증오를 부추기는 일을 우선적으로 행합니다. 그는 오르마츠드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언제나 사악한 아리만의 세력을 키우려고 애를 쓰는 인간군을 가리킵니다. 그는 힘없는 사람들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공포심을 조장하며, 인위적으로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악마가 “절단 기계 devil” 내지 “감금 기계”를 가리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윤노빈 73: 156). 이로써 힘없는 사람들은 언어의 본질을 왜곡하고, 엄청난 고통과 부자유 그리고 감금과 불신의 상태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들은 고통의 계곡으로 인도되어, “인내천 人乃蚕”의 시퍼런 도깨비불 속에서 갇힌 채 서로를 헐뜯고, 불신하며, 기만하고 경멸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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