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북구문헌

서로박: 에스페달의 자연을 거슬러

필자 (匹子) 2021. 1. 2. 09:58

토마스 에스페달: 자연을 거슬러, 손화수 역, 열린책들 2014.

 

책을 뒤지다가 우리는 가끔 크게 목청 높여 소리 지르지 않지만, 조용히 우리의 마음속을 강하게 파고드는 소설 작품을 발견하곤 합니다. 이러한 유형의 작품은 천박하지도 그리고 격정적이지도 않습니다. 마치 사원의 합창소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우리에게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양의 어휘로 독자를 사로잡거나, 거친 바다의 매몰 찬 파도의 거품 대신에 독자의 마음을 냉정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꾸밈없이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노르웨이의 소설가, 토마스 에스페달의 얇은 소설, 자연을 거슬러는 이에 해당합니다.

 

48세의 사내는 1231일에 우연히 젊은 여성과 만나 상대방에 대해 호감을 가집니다. 새해가 밝아오자, 두 사람은 서로 헤어질 수가 없어서, 함께 어디론가 떠납니다, 사내는 여성과 잠자리를 함께 합니다. 그미는 어둠 속에서 방안을 더듬다가 그만 램프를 쓰러뜨립니다. 사내의 집은 마치 도서관처럼 수많은 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두 사람은 책상 위의 펜 그리고 종이를 쓸어버리고, 그 위에서 격정적으로 상대방의 몸을 탐합니다. 일순간 품은 열정은 화려하게 불타오르게 된 것입니다. 한 사내의 거대한 사랑의 불꽃이 그때부터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사내는 마지막에 혼자 남아 있습니다. 자신을 내버려두고 떠난 그미에 대한 온기는 마치 작은 바늘처럼 자신의 심장을 살며시 찔러대는 것 같습니다. 사내는 옷장 속에서 그미가 두고 간 치마를 발견합니다. 가슴이 울컥하여 사내는 옷장 속에 들어가서 흐느껴 웁니다.

 

사내는 바닷가의 작은 집을 임대하여, 작은 집의 지하실에 칩거하면서, 자신의 실패한 인생 이야기를 서술하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는 세 가지 사항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그가 일하는 장소에서 최근에 발생한 젊은 여성과의 풋풋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부자연스러운 매력에 이끌려 사랑에 빠진 그미는 결국 부자연스러움 때문에 사내와 헤어집니다. 두 번째는 극단적 성격의 여배우를 사랑하던 이야기입니다. 여배우는 로마와 니카라과로 떠나서, 사내 역시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그와의 사랑을 통해서 딸이 태어나게 됩니다. 이야기는 유일하게 독자가 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서술되고 있습니다. 10년 후 여배우는 불현듯 사망하게 되고, 사내는 눈물을 감추면서 그미의 유골을 정원에 파묻게 됩니다. 여배우의 죽음은 그에게 자연의 무자비함을 일깨우는 계기로 작용한 셈입니다. 세 번째는 축제에서 알게 된 젊은 여성에 대한 성스럽고도 절망적인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그는 젊은 여성을 마치 자신의 딸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친딸과 살을 섞는다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이때 출현하는 죄의식은 그야말로 자연의 법칙을 거슬리는 사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세 가지 사랑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책상 위에서 행해지는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과의 거친 섹스에서 시작되어, 노르웨이의 어느 별장의 지하실에서 행해지는 집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시선은 마치 엘로이즈를 그리워하는 아벨라르두스의 그것을 방불케 합니다. 그래, 작품은 떠나간 엘로이즈를 뒤늦게 그리워하는 현대의 아벨라르두스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깁니다. 사내는 실제 현실에서 행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사랑 때문에 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우리는 동정을 표해야 할까요, 아니면 비난을 가해야 할까요?

 

에스페달의 작품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이고 진정한 작품입니다. 왜냐하면 소설의 주인공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인으로서 고전 작품의 주인공들과는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소설은 우리 주위의 성숙한 개인들의 다양한 삶의 양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에스테달의 사랑의 이야기는 대부분 현대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독을 대치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의 연애 소설의 압권은 단순히 사랑과 성에 대한 묘사를 넘어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겪으면서 그 다음 날 망각하는 사랑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가령 다음의 상황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딸과 함께 집에 혼자 있다. 그미는 대부분의 경우 아침 다섯 시에 일찍 일어난다. 주위는 어둡다. 우리는 부엌 식탁에 앉아서 아침이 도래하기를 기다린다. 밤이 사라지고, 서서히 동이 트면 아침이 찾아온다.” “행복해지면 눈이 멀게 되는 것일까. 행복에 취해 있으면 물처럼 투명하고 햇살처럼 얇은 막이 눈앞을 가리기 마련이다. 그것은 매우 유쾌하고 편안하고 기분 좋은 것이다. 내가 그녀의 불행을 볼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토마스 에스테달은 이미 11권의 소설을 집필하였습니다. 그의 강점은 자신의 보호받지 못한 체험을 정직하게 서술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묘사에는 불필요한 치장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2011년에 간행된 소설 떠나기, 혹은 거칠과 시적인 삶을 영위하기는 한 인간의 여행을 서술합니다. 한 인간은 수개월 동안, 아니 수년 동안 걸쳐 가벼운 등산가방을 매고 어디론가 정처 없이 걷습니다. 기력이 소진해서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피곤하면, 그는 자신이 어떤 다른 인간으로 변신하는 것을 감지합니다. 이 책에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당신은 평생 당신 자신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연인을 발견할 것입니다. 당신은 친구들과 가족을 떠나, 어디론가 여행하여, 새로운 도시, 낯선 장소를 찾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소유한 물건을 팔아치우고, 당신에게 맞지 않는 모든 것들과 결별하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살아 있는 한 당신은 당신 자신과 결코 결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작가가 어째서 자신에 관해 서술하고, 독자가 줄거리에서 유추하는 결말을 뒤집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야말로 광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놀라운 이야기를 매일매일 토해내고, 우리가 포만감을 느끼지 전에 벌써 그러한 놀라운 이야기를 집어 삼키지 않습니까? 그러나 에스페달이 묘사하는 세계는 현실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가상적이고 문학적인 세상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독자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독자가 갈구하는 미래의 삶의 흔적을 유추하게 해줍니다. 물론 때로는 그게 분노의 끔찍한 상으로 출현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요약하건대 에스페달의 소설은 명징한 언어 구사로써 위선과 허영의 옷을 벗어던진 우리의 감추어진 자아, 그 순수한 알몸을 되새기게 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