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북구문헌

서로박: 입센의 들오리 (2)

필자 (匹子) 2021. 4. 10. 09:17

(6) 들오리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동물들 가운데에는 이제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들오리 한 마리도 섞여 있었습니다. 들오리는 헤드비히의 소유였지요. 아버지를 마치 신처럼 모시는 터라,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떠날 때, 들오리를 잠깐 빌려주곤 하였습니다. 헤드비히의 성스러운 세계에서는 들오리는 한 마리의 거친 날짐승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에크달은 들오리의 부자연스러운 생활방식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그것과 비교하곤 했지요. “놈은 뚱뚱해졌어. 이제 과거에 새로서 느꼈던 거칠고 황량한 삶을 잊어버렸어. 그게 문제란 말이야.” 이 모든 것은 주인공, 그레거스의 눈에 투영됩니다. 처마에서 살아가는 환상적인 삶, 바닷가에서 피 흘리도록 자신을 물어뜯는 들오리의 이야기 등이 그것이지요. 들오리는 사냥개가 자신을 물려고 할 때, 하늘로 솟구치곤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들오리는 환상 그리고 거짓으로 뒤섞인 에크달 가족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이나 다름없습니다.

 

(7) 세 명의 극단적인 남자: 그레거스는 마치 사냥개처럼 진리를 찾아내어 모든 거짓된 추측들을 벗기려고 합니다. 주인공의 거짓된 추측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자유주의의 지조를 지닌 의사, 렐링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렐링은 모든 이야기를 그냥 막연하게 건성으로 받아들입니다. 렐링의 눈에는 주인공이 하찮은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편집증 환자로 비칠 뿐입니다. 어느 날 저녁 그레거스는 친구인 에크달을 찾아가 오랫동안 깊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는 친구가 아내의 과거사를 떳떳이 밝히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뒤이어 자신의 아버지가 기나 한젠과 사랑을 나누었으며, 이로써 헤드비히가 태어났으리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에크달은 심한 불쾌함을 드러내면서, 주인공의 주장을 헛된 망상이라고 대꾸합니다. 여기서도 친구가 어린 시절의 몽상가의 때를 벗지 못했다는 특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가정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하지만, 에크달에게는 이를 실천할 용기가 없습니다.

 

 


Bildergebnis für ibsen wildente

 

들오리에서 열연하는 배우 시몬 슈타인

 

 

(8) 불쌍한 소녀, 헤드비히: 그레거스가 친구 에크달과 대화를 나눌 때 헤드비히는 우연히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가령 그레거스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네의 딸은 그미의 사랑을 중명하기 위해서라도 가장 큰 희생을 치러야 해.” 여기서 가장 큰 희생이란 “들오리를 죽이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순간 헤드비히는 그레거스의 말을 전혀 달리 이해합니다. 언젠가 아버지, 에크달의 다음과 같은 헤드비히의 기억 속에 분명히 떠오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딸아, 너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니?” 헤드비히는 완전히 성장한 처녀가 아닙니다. 어린 그미는 아직 농담과 진담을 가릴 능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모든 말은 예외 없이 진지하게 수용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헤드비히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주인공의 말을 잘못 이해합니다. 그미는 들오리를 죽이는 대신에, 다락방에 올라가서, 피스톨로 자살합니다.

 

(9) 거짓과 진실의 틈바구니에서: 주인공 그레거스는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기나 한젠 사이의 육체적 놀음을 집요하게 추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적 자체가 비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비밀스러운 관계 그리고 이로 인해 태어났을지 모르는 아이 - 이 모든 수수께끼는 해명되어야 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렐링 박사는 삶의 허위 내지 거짓이 오히려 어떤 자극적 원칙으로 작용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친애하는 Y, 그렇다면 과연 그레거스의 태도가 잘못이었을까요? 아버지와 기나 한젠 사이의 비밀이 밝혀지지 않는 게 능사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극작품에서 중요한 사람은 그레거스와 렐링입니다. 전자는 모든 것을 밝히려고 하고, 후자는 모든 것을 은폐하려고 합니다. -이는 다락방 그리고 들오리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입센은 분명히 시민주의 사회에서 진실과 거짓 사이의 상관관계를 극한적으로 묘사하려고 했습니다.

 

(10) 에크달, 무기력하게 몽상하는 예술가: 또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다락방의 거짓된 자연은 사진 현상실의 거짓된 기술과 일치됩니다. 히알마르 에크달은 미식가로 살아가지만, 실패한 예술가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모든 예술적 능력을 그저 어떤 환상 공간을 창조하는 데 소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입센은 에크달이라는 인물을 결코 긍정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습니다. 에크달이라는 인물은 현실과 가상 사이의 괴리감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 몽상적 예술가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주인공 그레거스 또한 입센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극작가 입센을 지칭하기에 주인공은 너무나 철저하고 분석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레거스와 에크달은 작품, “페르 귄트”에 등장하는 두 명의 여성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전자가 정결하지만 인생의 맛을 모르는 솔베이지라면, 후자는 삶의 달콤함을 즐길 줄 알지만, 음탕한 아니트라를 지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