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북구문헌

서로박: 입센의 존 가브리엘 보크만

필자 (匹子) 2020. 10. 9. 14:41

헨릭 입센 (Henrik Ibsen, 1828 - 1906)의 「존 가브리엘 보크만」은 4막으로 이루어진 극작품인데 1897년 1월 10일 헬싱키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입센이 집필한 말년의 작품으로서, 거짓과 위기의식으로 가득 찬 세기 말의 전형적인 시민주의 인간형을 예리하게 해부하고 있습니다. 나는 입센의 전반적인 문학적 경향을 다른 글에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오늘은 바로 작품에 관해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대의 배경은 대도시 크리스티아니아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농장입니다. 그것은 렌트하임의 가문에 속하는 것인데, 왕년에 은행가로 일하던 존 가브리엘 보크만과 그의 아내, 군힐트가 살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두 사람은 대화 없이 고독하게 살아갑니다. 그들은 제각기 자청해서 고독을 선택하였으므로, 상대방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존은 조만간 칠십 나이에 접어드는 노인입니다. 그는 농장의 맨 위의 층에 은거해서 살아갑니다. 그는 마치 “우리에 갇힌 병든 수컷 늑대”를 방불케 합니다.

 

한 층 아래에는 그의 아내, 군힐트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미는 천장으로부터 남편의 걸음소리를 듣고 자주 짜증을 냅니다. 존이 만나는 사람은 오로지 빌헬름 포르달이라고 불리는 어린 시절의 친구, 그리고 친구의 딸 프리다입니다. 프리다는 존을 위하여 피아노 한 곡을 언제나 연주하는데, 그 곡은 생상스의 「음산한 춤 Danse macabre」입니다.

 

 

 

그렇다면 존은 어떠한 이유에서 어둡고도 우울한 죽음의 춤을 즐겨 듣는 것일까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입센은 놀라울 정도로 극적 기법을 서서히 도입합니다. 군힐트에게는 쌍둥이 여동생이 있습니다. 그미의 이름은 엘라 렌트하임입니다. 엘라는 오래 전부터 불치의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눈보라가 펑펑 쏟아지는 어느 겨울밤 엘라는 죽기 전에 언니와 대화를 나누려고 방문을 두드립니다. 그후 군힐트는 8년간의 침묵을 깨고 여동생과 오랜 대화를 나눕니다. 두 여인은 왕년에 한 남자를 동시에 사랑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광부의 아들인 존 가브리엘 보크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쌍둥이 자매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게 된 것이었지요.

 

 존은 어린 시절부터 엄청나게 큰 권력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의 거대한 환상은 말하자면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여 권력을 휘두르겠다는 것이었지요. 존은 이를 위해서 가급적이면 빠른 기간 동안 주정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직책을 차지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는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불행하게도 어떤 순간에 몰락의 아픔을 맛봅니다. 변호사로 일하던 어느 친구가 존을 동업자로 함께 일했는데, 존은 사업의 와중에서 거액의 횡령죄로 고소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친구들이 존 때문에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습니다. 친구들 가운데에는 이를테면 빌헬름 포르달도 있었습니다. 존의 횡령죄는 주정부에서 커다란 스캔들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존은 3년간 법정 소송에 시달렸으며, 5년간 감옥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존이 저지른 잘못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군힐트는 자신의 여동생을 물리치고, 존의 아내가 되었는데, 이후에 존이 체험했던 “참혹하고 끔찍하며 수치스러운” 법정 공방으로 인하여 무척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군힐트는 보크만 집안의 명예를 되찾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존 가브리엘에게서도 엿보입니다. 존은 출옥 후에 은행장이 되어, 왕년의 영화 (栄華)를 되찾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지요. 스스로 아무런 죄가 없다고 다짐하면서, 그는 심지어는 자신으로 인해 희생된 친구들에게 미안함을 느끼기는커녕, 이들을 비웃으며 살아갑니다.

 

친애하는 K, 흔히 부모들은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막연히 자식에게 전가하곤 합니다. 존과 군힐트의 경우는 자식에 대한 기대감이 도를 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외아들, 에어하르트가 있었는데, 아들이 그들의 못다 이룬 희망을 실현시켜 주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에어하르트는 이제 23세의 대학생입니다. 특히 아들에 대한 병적 집착은 군힐트에게서 강하게 드러났습니다. 실추된 가문의 명예는 자식 세대에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항변하였으니까요.

 

 눈보라치는 겨울밤 두 여인이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두 가지 비밀을 알려줍니다. 첫 번째 비밀은 엘라 역시 조카인 에어하르트에 대해 어머니로서의 모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년 동안 과거 법정 소송이 진행될 때 존과 군힐트는 아들을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엘라는 조카를 마치 친어머니 이상으로 세심하게 돌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측은지심에서 조카를 돌보았는데, 이러한 감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성으로 돌변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그미 자신에게도 어머니로서의 권한이 있다고 언니에게 고백합니다.

 

두 번째의 비밀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엘라는 존 가브리엘의 내연녀였습니다. 존은 사랑보다도 자신의 출세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엘라에 대한 애정은 가슴속 깊은 곳에 머물렀는데, 나중에 비밀스러운 밀회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군힐트는 엘라의 어처구니없는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아니, 자신의 여동생이 몰래 남편과 만나, 살을 섞다니. 이는 청천벽력처럼 느껴졌습니다. 남편의 배반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그미의 뇌리를 스쳤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밤에 그들은 에어하르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노파는 그를 기다리는 동안에 놀라운 대화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갈망을 스스로 충족하기에는 모두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기심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바라던 바는 다음 세대에 반드시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어하르트는 어느 축제에 참가한 뒤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두 사람의 제안을 경청합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가문의 치욕을 갚아 달라는 어머니와 이모의 제안은 모두 거절당합니다. 에어하르트가 부모와 사회의 간섭 없이 살겠다고 공언했던 것입니다. 자신 주위에는 두 명의 여자 친구가 있는데, 그는 그들과 남쪽으로 떠나려고 합니다. 그냥 즐기면서 편안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는 세속적이고 방종한 여자, 파니 윌턴 그리고 젊고 순진한 처녀 프리다와 함께 생활하다가, 나중에 그들중 한 사람과 결혼하려고 합니다.

 

다른 한편 존 가브리엘은 이들의 만남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눈 덮인 들판으로 향합니다. 마지막 힘을 다해서 어느 산정에 도달했을 때 그의 눈앞에는 어떤 놀랍고도 신비로운 형상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자신이 모든 인류의 축복을 받으면서 하나의 제국을 건설하는 상이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손이 얼음과 같은 차갑게 됩니다. 결국 그는 눈 속에 파묻힌 채 목숨을 잃습니다. 존의 시신 (屍身)은 상대방을 증오하는 자매에게 이송됩니다. 과연 두 자매가 화해할까요, 아니면 여전히 침묵하며 살아갈까요? 이에 관해서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한 남자를 사랑해온 두 여인은 겉으로는 태연함을 드러내며, 애써 인간적 태도를 취합니다.

 

입센은 이 극작품을 통하여 전하려고 한 것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습니다. 즉 시민 사회는 냉정한 의무감만 강요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하고 자연스러운 향락적 욕구는 기성세대의 속물들의 의무 사항에 의해서 처절할 정도로 억압당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친애하는 K, 21세기에 남한에서 살아가는 당신은 20세기 초에 노르웨이에 살았던 에어하르트처럼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의무를 강조하는 기성세대의 요구사항들을 박차고 당신 뜻대로 삶을 즐기며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행동했다가는 당장 가족들은 당신을 “백수”라고 비난할 테지요. 작품에서 에어하르트는 취직 걱정 없이 젊은 처녀들과 세계를 방랑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페르 귄트의 갈망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만 세계는 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 당면한 현실이 우리가 누려야 할 자유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주어진 장애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존 가브리엘 보크만은 그 자체 기이한 이름입니다. “존”과 “가브리엘”은 특성상 서로 맞지 않아요. “존”은 19세기 산업 사회에서 활동적으로 일하는 “개미”를 연상시키는 반면, “가브리엘”은 구약 성서의 신비로운 믿음을 추구하는 인간형을 연상시키니까요. 전자가 충실한 삶과 경력을 쌓는 “속물 (homo normalis)”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신비로운 이상을 꿈꾸는 병적 증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존 가브리엘은 한편으로는 권력을 차지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대한 제국의 신비로운 상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극한적으로 와해된 이중적 특성을 지닌 인물입니다. 이러한 인물의 유형은 유럽의 병든 시민사회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군힐트 역시 자신의 병적 집착을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미가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고상한 가문의 명예를 되찾는 일입니다. 아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자신의 가문이 겪었던 치욕을 앙갚음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요. 군힐트의 집착은 아들의 독자적인 삶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간섭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미는 이러한 생각을 결코 저버릴 수 없습니다.

 

친애하는 K, 자식이 잘 되기를 기대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요? 그렇지만 자식의 삶은 오로지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희생될 수는 없습니다. 군힐트의 여동생 엘레 역시 언니와 유사하게 생각합니다. 에어하르트가 차제에 재산, 명예 그리고 권력을 몽땅 차지하여 자신이 겪었던 수모와 고통을 보상해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엘레는 죽기 전에 그에게 “레트하임”이라는 성 (姓)과 자신의 재산을 모조리 물려주려고 합니다.

 

 친애하는 K, 입센이 오슬로에서 작품을 완성하는 데 불과 6주가 소요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인물 묘사는 과히 놀라울 따름입니다. 세 명의 노인, 즉 존 가브리엘, 군힐트 그리고 엘레는 스스로 모든 것을 실현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 세대에 속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제각기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존 가브리엘은 “권력”을, 군힐트는 “가문의 잃어버린 명예”를, 엘레는 “떳떳한 사랑”을 갈구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식의 세대가 그들의 이루지 못한 욕망을 실현시켜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한 한 그들은 에른스트 블로흐가 말한 대로 “시민적 이상과 시민적 실제를 서로 합치시킬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